이런 데이트 어떨까요?

2010.08.04 09:59

차가운 달 조회 수:4928

 

 

 

아래 애인이랑 책읽기 좋은 곳 게시물 읽고 문득 든 생각인데요...

 

그 사람에게 강남이나 교대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만나자고 해요.

그 사람 집은 거기서 가깝거든요.

평일 한낮, 사람들이 모두 휴가를 간 서울 도심은 한적한 느낌마저 들죠.

그 사람과 저는 지하철역에서 만나 밖으로 나와요.

어쩌면 날씨가 조금 흐릴지도 모르겠어요.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음료수를 하나씩 사는 거죠.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요.

빨간색 광역버스.

그곳이 기점이기 때문에 마침내 도착한 버스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과 저는 아무 데나 앉고 싶은 자리를 골라서 같이 앉아요.

 

자리에 앉은 다음 저는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내요.

그 사람에게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를 건네고,

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꺼내죠.

가든파티는 단편집이라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두 편이나 세 편 정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요.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역시 가상의 인물들을 다룬 전기 형식을 띠고 있어서 단편집과 비슷해요.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말없이 책을 읽어요.

물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상관없죠.

사람이 아무도 타지 않네, 라든가 이 음료수 맛있다, 라든가 말이에요.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 시원스럽게 뚫린 국도를 달리기 시작해요.

이따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면 무성한 여름숲이 보이죠.

그리고 두 사람은 책을 덮고 마침내 버스에서 내려요.

조금은 황량한 느낌마저 드는 국도변의 버스 정류장이죠.

길가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긴 옥수수들이 서 있어요.

그 사람과 저는 조금 걸어요.

그리고 어느 공터에 세워놓은 차로 가서 타는 거죠.

물론 제가 미리 준비해 놓았어요.

그대로 차를 몰고 국도에서 지방도로 빠져요.

 

창밖은 금세 시골 풍경으로 접어들고,

차들이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에는 이따금 과속방지턱이 나타나죠.

얼마 가지 않아 도로는 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해요.

다른 쪽에는 비탈에 선 나무들이 있구요.

그리고 드문드문 찻집과 음식점을 겸한 가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죠.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 두 사람은 차를 마셔요.

평일이라 사람도 없고 실내는 조용한 음악만 나오겠죠.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읽은 책에 대해서 얘기해요.

그 사람은 캐서린 맨스필드 단편집 중에서 제일 처음 읽은 '딜 피클' 얘기를 하겠죠.

기억나는 대로 자세히 해달라고 해요.

저는 조용히 그 사람의 얘기를 듣고, 또 가끔은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다음엔 제가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서 제일 마지막 장인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 얘기를 해요.

그리고 그 얘기를 발전시킨 볼라뇨의 또 다른 소설 '먼 별'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는 거죠.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한참 책 얘기만 해요.

 

아까 그 게시물을 읽으면서 일단 여기까지는 게시물을 클릭하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동영상처럼 막 떠올랐어요.

글쎄요, 그 다음엔 뭘하죠.

그렇게 찻집에서 한참 놀다가 저녁이 가까워지면 밥도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야겠죠?

 

그런 데이트를 한번 해보고 싶네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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