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돋는 바낭

2012.10.21 21:22

발그레고양 조회 수:894


오늘 오랜만에 홍대에 갔다가 10여 년 전 함께 즐거이 놀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PC통신 소모임 친구였는데,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나브로 연락이 끊긴 케이스지요. 모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가끔 이상한 사람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매력있고 점잖은 사람들이 많아서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회원들은 지금은 작가나 기자, 가수, 일러스트레이터 등등 다양한 직종에서 활동하면서 살고 있더라구요. 여기서 만난 사람들끼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랬는데 근황을 들으니 그동안 이혼도 많이 하고; 그래도 친구로 잘 지내고; 있더군요. 뭐 능히 그럴 만한 사람들입니다. "전화해서 불러낼까?' 그러는데 왠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으로 기회를 미뤘지요.

한때는 온라인상에서 얼굴을 알 수 없는 상대와, 오로지 순수하게 서로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예의바르게요. 그 과정에서 코드가 맞지 않으면 살며시 퇴장하면 되고, 잘 맞으면 게시판이나 대화방을 통해 만남을 이어가다 나중에 오프에서 친분을 더 쌓아가기도 했죠(듀게의 매력도 어쩌면 이런 성격이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곳이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논쟁을 벌여도 지금처럼 칼을 들이밀고 얼굴 붉어진 사람의 감정이 텍스트에 묻어나는 돌직구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메타포를 담은 변화구가 주를 이뤘죠. 그러다보면 논쟁 자체보다는 문학적, 철학적 내공에서 밀렸다는 생각에 분해 하면서 스스로 절차탁마, 권토중래, 와신상담의 길을 가게 독려하는, 선순환 구조;이기도 했구요. 요새 다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저는 가끔 그 당시가 그런 이상적인 균형이 이루어졌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오로지 인풋과 아웃풋, 공허한 콘텐츠, 욕망과 본능만 남은 요즘의 혼란스럽고 피폐한 정서가 아닌, '사람'이 있었던 때였던 것 같아요. 

매력적인 이성을 상대로 한 뻔한 수작 같은 것도 귀엽게 느껴지던 시절이었죠. 정모에서 은근히 취기가 돌면 6X년대생 모님은 항상 미녀회원, 미남회원 뽑기를 했더랬습니다. 사실 회원 중에 정형화된 미녀 미남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매력녀, 매력남은 꽤 많아서 그걸 가지고 서로를 곤혹스럽게 하고, 또 혹자는 은근히 즐기면서 90년대판 '짝'을 찍기도 했죠. 더 좋았던 건 그때는 비단 이성에 대한 관심과 실천(!)도 있었지만, 연령과 성별을 뛰어넘어 우정을 쌓기도 했던 시기였다는 거죠. 40대 중반 아저씨와 스무살 먹은 여대생이 밤을 새워가며 재즈에 대해 얘기하고 절친이 되기도 했던. 지금 같으면 뭔가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겠죠. 그때는 그저 음악 들으며 맥주 한 잔 하고 잡담 좀 하다가, 11시가 넘으면 뭔가에 홀린 듯 흐지부지나 명월관 가서 정신 좀 놓고, 새벽 3시쯤에 버섯찌개매운탕 먹고 놀이터 앞에서 널부러져 있다가 피로에 쪄들어 아침 첫 차를 타고 돌아가는 건전한 번개만으로 만족하던 때였죠. 나이를 떠나 이런 사이클의 만남은 사실 지금이라면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노는 문화 자체가 너무 바뀐 듯한 느낌이죠. 그것도 보다 즉물적으로. 단순하고 세분화되어.

놀랍고 서글픈 건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나이는 벌써 중년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 요즘 유행하는 복고 정서 같은 건 사실 우리 세대의 노땅 선언을 기정화하는 것 같아서(용납할 수 없다!)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았었는데, 세기말의 정서에 감정적으로 호출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어쨌든 2000년 초반 인터넷 시대를 시작으로 소모임은 사라졌고 그 무렵 발간된 책 한 권에서 함께 놀던 회원들의 아이디만이 이제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추억 돋는 상념에 잡혀 있다가 해도 저물고 날도 쌀쌀해지자 '사케나 한 잔 할까' 했지만 5초 후 이구동성으로 '피곤한데 다음에 하자'고 답해 멋쩍게 웃은 저와 친구는 그렇게 기약도 없이 10여 년 만의 짧은 번개를 마치고 헤어졌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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