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거스 반 산트 감독의 밀크와 파라노이드 파크 두 편을 봤습니다.

 

#1. 밀크.

 

지금 네이버에서 배우 필모그래피를 보고 왔는데 제가 숀 펜 주연의 영화를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아이엠 샘도 안 봤고 21그램도 안 봤고 이름은 익숙한 씬 레드 라인도 안 봤고...

중학교 때 데드맨워킹은 학교에서 본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요.

어쨌든 처음 봤는데 멋있었고, 감동했습니다. 찾아보니까 실존인물이랑도 제법 닮았어요. 약간 분장(변장)은 한 것 같지만요.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났어요.

무모하게 계속 의원직에 도전하는 걸 보면서 노 전 대통령이 생각나기도 하고

차별금지를 반대하는 우리나라 현 상황도 자꾸 떠올랐죠.

우리나라에서 게이임을 밝히고 정치인이 될 사람은 언제 나올 수 있을까.

하비밀크가 당선 된 게 1977년인데 우리나라는 그로부터 한 오십년 지난 뒤인 2027년에라도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요.

 

DVD로 봤는데 삭제컷 중에서 나쁜 꿈을 반복해서 꾼다며 쉰 살 까지 못 살 것 같다는 장면이 있었어요.

이 삭제씬 말고도 영화 중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몇 번 더 나왔던 것 같은데, 결말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

아니 자기 생의 결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어요.

 

정치 하느라 정말 죽이 잘 맞아보이는 제임스 프랑코랑 헤어진 것도 너무 현실적이고

다른 정신적으로 어린 새 애인 디에로 루나와 이러저러하게 다투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것도 슬펐어요.

전 그 칭얼대는 애인이 피곤해서 보는 내내 '아 쫌!'하고 외쳤지만 사실 상냥하고 귀여운 맛(;)도 있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은 건 아닙니다.ㅎ

 

멋있는 실존인물과 가슴 벅찬 희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서 보고 나서 여운도 제법 오래 남았어요.

 

 

 

#2. 파라노이드 파크

 

이건 어제 봤는데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80분짜리 영화였는데 한 3번인가 4번 일시정지 시키고 듀게질을 했어요; ㅋㅋ

 

영상미나 음악, 주연 배우의 얼굴과 표정 그 자체가 인상적이긴 했는데 마구 몰입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보는 내내 든 생각은 내가 이 영화를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새내기 때 봤으면 좀 더 공감할 수 있었을까, 이 영화를 너무 늦게 보고 있는 건가 하는 거였어요.

이 영화랑 비슷한 감상을 준 영화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었어요.

릴리슈슈 좋아하시는 분들 많을텐데 전 작년엔가 봤어요. ...봤는데 보는 동안 좀 졸고 딴짓도 하고 그랬어요. 에테르 운운하는 것도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만 들었죠.

 

한편으로는 접한 시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제가 이제 머리도 굳고, 마음도 굳고, 그래서 뭘 보든 예전만큼 감흥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조금 쓸쓸했어요.

나이가 들 수록 받을 수 있는 감동의 크기가 작아진다면 덜 피곤하긴 하겠지만(어느 순간부터 감동을 받으면 좋긴 한데 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하더라고요?ㅠㅠ)

그만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작아진다는 말도 되니깐요. 그렇게 즐거운 건 적어지고 재미없는 것만 늘어나는 시시한 어른이 되고...ㅠㅠㅠㅠ

 

어떤 특정 장면장면은 계속 생각나긴 하는데 먼저 봤던 밀크만큼 여운이 길지는 않네요.

 

 

 

#3. 밀크 보고 난 뒤에 생각난 김연수의 글 한 토막 올립니다.

 

http://yeonsukim.tumblr.com/post/38371150553

 

 

그러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소망과 꿈과 희망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그 일련의 죽음들 앞에서 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냐면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건 저보다 먼저 살았고, 저보다 먼저 소설을 썼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설에 무수히 남겨놓은 바로 그 문장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의 길을 갈 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쪽을 택할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이 좌절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에 대해서 한 번 더 말할 때, 이 우주는 달라진다는 말.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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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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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 역시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제가 쓰는 소설의 결말은 모두 여기까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소설은 새드엔딩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정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마치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봅니다. 하지만 그건 절대 느닷없지도 않고, 기적도 아닙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건 절망과 오해와 불행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소망했던 바로 그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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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절망을, 오해를, 불행을, 무엇보다도 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가 두려워해야하는 건 냉소와 포기입니다.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사실 글은 2012년 대선 후에 올라온 글입니다.

김연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꽤 충격을 받았는지 최근의 에세이집은 물론이고 문학 계간지 대담 등에서도 그 이야기를 꽤 자주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문재인 보다는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는데 뭐 그건 작가랑 이야기를 나눠보질 않아서 모르겠고요;;

대선 후에 정말 매일 밤 자기 전에 이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어요.

 


 

#4. 언젠가는 기적처럼 바뀐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으며...힘을 좀 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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