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후기] 8th. 페르시아인들

2013.04.22 13:42

brunette 조회 수:2898

(2010년 웨일즈 국립극장이 공연한 [페르시아인들]에서 아톳사 여왕과 코러스, 전령)

 

 

1. 아이스킬로스

 

2월 16일 여덟 번째 희곡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모임에서는 아이스킬로스를 읽었습니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비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이스킬로스. 그는 평생 70편이 넘는 작품을 썼지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7편 뿐인데, 이날은 그 중 가장 초기작으로 추정되는 [페르시아인들]을 읽었습니다. 기원전 472년 디오니소스제 비극경연대회 우승작인 이 작품은 완성된 형태로 살아남은 최초의 그리스 희곡입니다. 서양 연극의 프로토타입인 셈이죠. 그 때문에 아이스킬로스가 '최초의 극작가' 또는 '비극의 창시자'로까지 불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아이스킬로스 이전에도 그리스에서는 연극이 활발히 공연되고 있었고 그가 비극 장르를 창조해낸 것도 아니니까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그는 공연 형식에 중대한 혁신을 가져온 인물입니다. 이전에는 배우 한 명이 거대한 코러스를 이끌던 것을(이때의 배우는 합창단장에 가까웠을지도요), 아이스킬로스가 배우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리고 코러스 역할을 줄여서 배우들의 대화가 극의 중심이 되도록 했대요. 아이스킬로스가 50세 넘어 쓴 [페르시아인들]에서는 이미 그런 시도들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배우 두 명이 요령껏 배역을 바꿔 가며 요즘 사람 눈에도 별로 어색하지 않게 극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20년 차이나는 소포클레스하고만 비교해봐도 코러스 부분이 훨씬 많아요. 음악이 함께 전해져 오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2. 살라미스 해전

 

현전하는 그리스 비극 33편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적 사건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입니다. 페르시아 전쟁, 그 중에서도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을 다루는데, 아이스킬로스 자신도 참전했던 전투라 거의 르포르타쥬 수준입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자잘한 도시국가(폴리스)들의 연합체였던 약소국 그리스가 이집트에서 터키, 이란, 파키스탄, 아랄해에까지 이르렀던 초강대국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섰던 전쟁입니다. 살라미스는 아테네에서 16km쯤 떨어진 작은 섬이에요.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300(노예와 연합군까지 합하면 1500)명의 전사들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전멸하자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포기하고 살라미스 섬으로 대피합니다.

 

아테네는 적군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불태워졌지만,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인들은 이 작품에 따르면 300척의 삼단노선으로 1207척의 페르시아 함선을 격파합니다. 숫자에는 과장도 섞였겠죠. 페르시아측은 살라미스에 오기 전 폭풍과 아르테미시움 해전으로 400척 가량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압도적인 수의 적군을 소규모 병력으로 방어해냈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30-40개 도시국가들이 모여 급조한 그리스 해군은 아테네, 스파르타, 아이기나, 코린트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살라미스 해전이 역사에 길이 남아 닳도록 이야기되나 봅니다. 강자에 맞선 약자의 승리는 언제나 쾌감을 주죠.

 

뒷 얘기는 그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이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아테네는 동맹의 회원국들에게 페르시아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삥을 뜯습니다.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페르시아 식민지들을 해방시킨 후 이제껏 페르시아에 바쳐오던 조공을 앞으로는 아테네에 바치도록 요구합니다. 살라미스 해전이 끝나고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아테네는 주변국에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제국이 되죠. 다른 도시들을 부당하게 대우한 덕분에 아테네의 재정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지고 민주주의도 활짝 꽃피우며(이제 아테네 시민들은 민회나 법정에 참석하면 보수도 받습니다) 정치, 철학, 역사, 교육제도, 건축,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인류의 문화유산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날 '서구문명'이라 부르는 것들의 원천을요.    

 

 

3. 검열에서 살아남기 VS 관제선전물로 전락하지 않기

 

이 전쟁에서 형을 잃은 아이스킬로스 뿐 아니라 당시 아테네 사람 누구라도 이 소재에 대해 신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인의 영광이자 자부심이었죠. 게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초연된 디오니소스 제전은 디오니소스 신을 기리는 종교 행사인 동시에 아테네의 정치, 군사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폴리스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국가 주도의 정치 행사였습니다.  이 연극의 스폰서는 25세의 페리클레스로 차기 대권주자인 그는 이번 무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 각인시키길 바랐을 겁니다.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푸스는 아테네의 전직 해군사령관으로 페르시아군이 설치한 부교를 해체하고 밧줄을 거둬온 사람이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부교 얘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닐지도요. 관객의 대부분은 8년 전 살라미스에 있었던 참전용사거나 그때 전사한 이들의 유족이었습니다. 아테네에는 따로 직업군인이 있었던 게 아니고, 전쟁 나면 시민들이 나가서 싸웠다고 하니까요. 참고로, 아이스킬로스의 선배작가 프뤼니코스는 아테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밀레토스의 함락]이란 극을 무대에 올렸다가 아테네 시민들의 노여움을 사 거액의 벌금을 물고 재공연을 금지당한 바 있습니다. 적이 저지르고 간 만행은 아직도 도시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였구요.

 

자, 여러분이 극작가이고 국방부 예산으로 해군전우연합회 같은 데서 천안함 사건처럼 최근의 민감한 이슈를 공연으로 올린다면, 게다가 자신들의 기억과 조금이라도 다른 대사가 나오면 야유를 퍼부을 태세인 수천 명의 관중을 앞에 두고 있다면 어떤 대본을 쓰시겠습니까? 당국의 검열은 프뤼니코스의 선례가 보여주듯 당연히 있을 테고요. 그런 상황에서 뻔한 애국주의 선전물 이상의 것을 쓰고 싶다면 고심 좀 해야겠죠.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인들이 주인공인 극을 만듭니다. 아테네 입장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신나게 노래하는 대신 페르시아 왕가에 드리워진 암울한 운명을 그려냅니다. 영리한 세팅이죠. (아이스킬로스가 처음 시도한 건 아닙니다. 지금은 소실되었으나 [페르시아인들]보다 4년 먼저 나온 프뤼니코스의 [포이니케 여인들]도 페르시아 궁정에 전해진 살라미스 패전 소식을 다룹니다.) 이 극에는 살라미스 해전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군 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는 물론 단 한 명의 그리스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4. [페르시아인들] 

 

배경은 수사에 있는 페르시아 궁정입니다. 궁정 원로들로 구성된 코러스와 아톳사 여왕이 등장해 전투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아톳사가 지난밤 꿈 얘기를 하는데 심상치가 않습니다. 꿈 속에 아름다운 두 명의 여인이 등장했는데 한 명은 페르시아의, 다른 한 명은 그리스의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아톳사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이 그 둘에게 멍에를 지우려하자 그리스 옷을 입은 여성이 격렬히 저항하다 결국 멍에를 부수고 자유를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때 전령이 도착해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아마 극에서 가장 열정적인 부분일 거에요. 전사한 페르시아 장군들의 이름이 그들의 출생국가, 소속부대, 특기, 휘하 병사들의 규모와 함께 몇 페이지에 걸쳐 집요하게 나열되고, 작살에 찔린 다랑어떼처럼 비참하게 죽어가는 페르시아 군사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됩니다. 아톳사는 무덤으로 가서 선왕이자 자신의 남편이었던 다리우스를, 아니, 그의 혼령을 불러 냅니다. (이 장면은 [햄릿]이나 [맥베스] 유령씬의 원조 같습니다.) 무덤에서 잠시 일어난 다리우스는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급한 성미와 무분별함, 그리고 오만을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특히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부교를 띄워 해류를 교란한 행위는 신에 대한 도전이며, 그와 같은 교만은 반드시 파멸의 열매를 맺고 눈물로 수확하게 되리라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대패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마침내 크세르크세스가 갈가리 찢어진 옷을 걸친 채 궁정에 돌아와 페르시아 군대의 전몰을 상세히 알리고, 그가 코러스와 함께 애통해하는 가운데 극은 막을 내립니다.  

 

줄거리만 봐도 비위가 상하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페르시아인들]은 현대 관객들에게는-최소한 리버럴들한테는-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고 인종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E.사이드는 이 작품을 오리엔탈리즘이 구현된 최초의 문학작품으로 꼽았죠.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인들의 머릿속에서 타자화된 동양을 보여줍니다. 검소한 그리스인들과 달리 그들은 황금으로 둘러싸인 궁전에서 살고 군대를 황금으로 장식하는 사치스러운 종족입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꿈을 꾸거나 주술로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기도 합니다. 민주정을 운영하는 그리스 자유시민들과 달리 아시아인들은 전제군주의 지배를 받고 있는 노예들이며, 전제군주의 독단과 광기에 따라 국가안위가 흔들립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패배자입니다. 이 작품에서 크세르크세스는 잘난 아버지 때문에 늘 존재증명 욕구에 시달리는 사춘기 소년처럼 묘사됩니다. 세상에, 이 사람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그 사람이라니!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이민족 적장 헥토르를 존경할만한 인격자로 그렸던 것과는 사뭇 다르죠. [페르시아인들]에 여러번 나오는 '바바로스(barbaros)'란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를 말하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호메로스 시절만 해도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간에 개념상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페르시아 전쟁을 거쳐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들]에 이르면 barbaros는 '야만인'이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아이스킬로스가 페르시아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쓰고도,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양을 타자화하여 그리스인의 우월성을 선전한 정치적인 작가였다는 말을 듣는 이유입니다.      

 

뭐,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페르시아인들]이 과연 적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드러내는 작품인지, 아니면 관객들로 하여금 패배한 적의 고통에 감정이입하도록 유도하는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아테네인으로서 아테네인을 위한 행사에서 페르시아의 시점을 채택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일 뿐더러, 이 작품은 페르시아의 패배를 즐거워하는 승전가가 아니라 패자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말하고 전사자들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거지요. 아테네 관객들이 환호하며 즐겼을 부분들도 분명 보이지만(페르시아 병력의 손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묘사되던지!) 남편과 아들을 전장에서 잃은 페르시아 여인들이 가슴을 치고 옷을 찢으며 침상을 눈물로 가득 적시는 장면이나 "바다의 소리없는 자식들"이 되어버린 이름없는 숱한 젊은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웃을 수야 없었겠죠. 그건 더 이상 동양의 야만인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 이야기였을 테니까요. 

 

또한 이 작품은 현재의 번영에 만족하지 못 하고 더 많은 부와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남의 나라까지 침공하는 페르시아를 비난하고 그런 제국주의적 시도들로 인해 결국 파멸하리라는 얘기를 하면서 당시 또 하나의 제국으로 팽창을 도모하던 아테네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다리우스의 입을 통해 크세르크세스의 오만과 탐욕을 '정신이상(역자에 따라서는 '광기'나 '영혼의 병')'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서는 워낙 '자유를 위한 투쟁', '해방전쟁' 등의 인상이 지배적이라 그런지 왕년의 프랑스 혁명가들과 그리스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찾던 텍스트라고도 하고요. 그리스 비극 치고 인기 레퍼토리는 아닙니다. 1, 2차 이라크전 때 반짝 공연붐이 일었긴 했지만요. 어떤 작품은 크세르크세스를 사담 후세인처럼 연출했고,  반대로 페르시아 궁정 사람들한테 부시 일가 이름을  붙여준 것도 있어요.

 

제가 이 작품에서 제일 신기했던 건 사실적인 묘사와 판타지의 혼재입니다. 종군기자 리포트 같은 전투 장면이 한참 나오다가 갑자기 죽은 다리우스 대왕이 지하에서 솟아나 아무렇지도 않게 대사를 칠 때 좀 놀랐습니다. 그 장면 뿐 아니라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인들]에서 내내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의 사이, 판타지 서사시인과 진지한 역사가의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갑니다. 자신이 목격한 것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이국적인 여왕과 아름답고도 불길한 꿈과 징조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상상을 펼치죠. 전쟁물보다는 판타지를 선호하는 저한테는 아무래도 후자 파트가 재밌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발레극 [라 바야데르]처럼 오리엔탈리즘을 아예 더 밀어 붙여서 오케스트라한테는 동양적 선율을 연주시키고, 코러스한테는 페르시아풍 의상을 입혀 화려한 군무를 추게 하고, 자기는 블록버스터급으로 전쟁 스펙타클 연출한다고 무대 위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이스킬로스가 떠오릅니다. 제 상상 속의 아이스킬로스. 

 

 

5. 슬픔을 나타내는 딘어 

 

지난 번 후기 때 dior님께서 달아주신 댓글 보고 저도 슬픔을 나타내는 12음절짜리 그리스어 단어가 무얼까 궁금하던 차에 [페르시아인들] 영역본에서 이런 표현을 찾았습니다. 12음절은 아니고 10음소. '오토토토토이Ototototoi'입니다. 새가 울부짖는 소리 같죠? 그 외에도 고통이나 비탄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적어 보자면,

 

aiai (이건 [아이아스]와 [필록테테스]에서도 보셨죠.)

aiai, aiai

io

io, io

oi

oioi

oioioi

papai

popoi

totoi

otototoi

 

천병희 번역에는 오오, 아아, 아이고 등으로만 나오네요. '오토토토토이'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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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분과 나눈 카톡 대화 몇 토막 더 올려요. 이번 후기는 두 달만이니까요, 길다 싶어도 양해 부탁드려요.:-)

 

 

-비극경연대회에서 13차례나 우승하고도 묘비명에 작가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적고 마라톤 참전용사였다고만 적었다는 아이스킬로스가 왜 마라톤을 공격한 다리우스 왕을 안 까고 그렇게 띄워줬을까요?

-싸움이 덜 더티했거나 아니면 잘난 적은 우리도 인정함, 이런 거였을까요? 크세르크세스가 똘똘하긴 했는데 좀 다혈질이었대요.

-하긴 파도 일어 선교 무너지자 바다에 태형 300대 치고 족쇄 던진 놈이죠. 크세르크세스에 비하면 다리우스는 인품있는, 뭐 그런? 근데 크세르크세스가 미쳐서 그런 게 아니라 고도의 선전행위였다더라구요. 종교적 행위 + 대민 선전 + 그리스 겁주기.

-사랑하던 왕비가 몸 좀 사렸다고 목 댕겅 날리는 짓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맞아요.ㅋㅋ

-좀 미친 놈 기질도 있었을 듯.

-살라미스 해전사 읽고 [페르시아인들] 다시 읽으니까 나름 박진감 넘치고 재밌더라. 우리가 그 날은 감동받기 초큼 부족한 상태였음. 아이스킬로스가 사료가치 있을 만큼 꽤 정확하게 묘사한 전쟁문학이더라구요. 아테네 쪽에 편파적이긴 하지만 그건 참전용사로서 당연한 거 같고, 게다가 드라마 대본이니까요.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도 얼마나 편파적인데.

-묘사는 아이스킬로스고 심리는 소포클레스인듯. 입문은 소포클레스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데 아이스킬로스 읽으면 잘 것 같아요. 에우리피데스의 막장 드라마도 궁금해지네요.

-그래서 제일 유명한 [오이디푸스 왕]으로 시작하긴 한 건데 소포클레스의 위대한 작품들을 너무 초반에 읽어버려서 아쉬움. 그때는 대단한 줄도 몰랐음. 그래도 마지막에 [필록테테스]는 잘 읽은 것 같아요. 계속 마음에 남아요.

-아 맞다. 북캐스트에 고전읽기랑 라디오인문학 있는데

-괜찮던가요.

-거기 소포클레스 작품 해설 나와요.

-오.

-교수님 앉혀놓고 발췌독하면서 배경 얘기해요. 집안일 하면서 틀어두세요. 재미있어요.

 

 

-잠깐 찾아봤는데 다리우스가 크세르크세스보다 유화책을 썼대요. 초반에 즉위 후 반란 강경진압한 거 외엔 종교적 관용도 그렇고, 그리스도 내버려두고 있다가 이오니아에서 반란 일어나서 그때부터 끼어든 거고 마라톤 전투도 본격적이지 않았지요. 원정준비하다 폭풍 일어서 그냥 접었단 얘기도 있네요. 어마어마한 대군 몰고 와서 도시 통채로 불태워버린 거랑은 임팩트가 달랐을 것 같긴 해요.

-오, 감사해요. 그 부분 궁금했는데. 테르모필레 전투 후 페르시아가 아테네 접수했지만 이미 아테네 시민들이 살라미스 섬으로 소개된 뒤라(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 시민들 설득하려고 신탁 조율하고 갖은 애를 써서 이룬 성과) 아테네는 텅 비어 있었죠. 그래서 크세르크세스가 반쪽의 성공 필요없다고, 끝까지 아테네 잡겠다고 살라미스 해전 벌였다가 패망했다고도...

-헐, 역시 기분파..

-크세르크세스가 다리우스보다 훨씬 더 나갔던 거죠? 자기가 성취한 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제국이라 그렇게라도 존재증명을 해야했나보다.

-즉위과정은 다리우스 쪽이 구렸던 것 같은데 성격문제가 크지 않았을까요? 감동 잘 하고 전쟁도 신하들이 꼬드겼던 같더라고요. 귀 얇은 남자.

-다리우스는 치열한 궁중암투 거쳐 즉위한 사람이고, 크세르크세스는 엄마 아톳사가 실권자라 편하게 물려받았다는대요.

-맞아요. 속임수로 피비린내 내며 즉위한 쪽은 다리우스고 그래서 초반에 강압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대요.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가 예뻐하며 찍어 놓은 후계자.

-하지만 즉위 후 왕권안정되고는 선정을 베풀었다.. 식민국도 무리하게 탄압하지 않고.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지중해 너머로까지 제국확장욕이 있었던 거고?

-다리우스가 선정을 베풀었는진 모르겠고 적당히 수위조절한 거겠죠.

-크세르크세스가 장남이 아니더라구요. 그런 거 보면 암투는 그리스 정권 못지 않았을 것 같은데.

-둘째인데 다리우스가 왕 된 다음에 태어난 애라서 후계자로 일찍부터 점지. 아버지 죽자마자 바로 즉위했어요.

-전투할 때 보니까 자기 형을 식민제후처럼 대하더라고요. 그 형은 실제로 어디 큰 식민지 다스렸음.

-헐.. 둘이 뭐 별로 친하진 않았겠지요..

-그 사람하고는 아무도 친할 수가 없었을 듯. 참모회의 그런 것도 잘 없었대요. 다 크세르크세스 마음대로.

-자기말 거스르는 거 엄청 싫어했다던데.

-참모회의 같은 건 그리스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너네는 광장에 모여 토론하는 데도 있다면서? 라고 그리스 귀족 인질한테 비아냥대요.

-막가파 황제였을지도요.

-전제군주니깐.

 

 

-페르시아의 정복욕을 미국의 세계제국화와 유사하게 보는 시각도 있더라구요.

-비슷할지도..

-근데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페르시아인들이 남긴 사료는 없나요? 그리스 역사가와 작가가 남긴 자료들이 지금까지 내려와 패러다임 구축한 거 같아서 좀 씁쓸. 객관성에도 의심은 가고요. 그렇다고 그리스 애들이 다 뻥친 거야라고 무시하기도 그렇고요. 

-페르시아 거는 남아 있더라도 책 내면 우리나라에선 안 팔리지 않을까요..

-서구 학자들 책도 잘 번역 안 되니깐.ㅜㅜ

 

 

-혹시 아르테미시아 여왕 알아요?

-???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한 여성이 있었더라구요.

-스파르타 출신이려나.

-스파르타 아니고 할.. 잠깐만요. 할리카르나소스.

-페르시아 식민지 출신?

-네, 그렇죠. 페르시아 다국적 연합군의 하나. 식민제후들 중 유일하게 크세르크세스한테 대든(?) 인물.

-헐. 목 안 잘렸나요.

-미녀.

-미녀는 조쿠나..

-근데 이미 장성한 아들 있었다 그러고 당대 조혼 풍습 감안해도 삼십대라 그녀의 미모는 후대인들의 과장일 거에요.

-동안이었을지도.

-그 나라 자체가 그리스인과 이민족의 경계에 속하는 다문화 도시였대요. 혼혈미인이었던듯.

-혼혈미인은 덜 늙으니까요. 까민 피부 쪽이면 더더욱. 클레오파트라식 미모였을 수도 있겠네요. 후대에는 점점 과장...

-남편 죽음 후 왕권 물려받았다는데 워낙 다민족 국가라 자국 장악하는 것도 보통 정치력 아니었대요. 크세르크세스한테 살라미스 해전 포기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치라고 조언.

-아깝..

-아테네 애들이 해전 강하니까 육군으로 그리스 반도를 쳐라.

-제대로 봤네요.

-그러면 살라미스에 모여 있던 그리스 연합군들은 자국을 지키러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을 거다.

-전쟁 잘한다@-@

-그죠. 상당히 정확한 조언. 헤로도토스도 감탄했대요. 그 여자가 크세르크세스한테 총애받는 거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크세르크세스한테 감히 반대의견 낸 거 보고, 이제 죽겠구나,  잘 됐다 싶었대요. 그런데 크세르크세스가 의외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신 의견 존중한다'고 나와서...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 치르겠다는 결심은 안 바꿨음.

-크세르크세스는 왜 말을 안 들었을까요?

-걔는 누구 말 듣는 얘가 아님. 수사 떠날 때부터 이미 마음 정했음.

-못 먹어도 고인 남자의 자존심? 

-아르테미시아가 그런 말을 해둔 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가 아니라 만일 페르시아가 전쟁에서 패할 경우 페르시아 궁정 내 그녀의 지위가 올라갈 것임을 미리 내다보고 던진 모험수였다고 해요.

-어느 쪽이든 여자로선 손해볼 거 없네요.

-다른 장군들은 크세르크세스를 쳐다도 못 봤대요.

-으휴..

-아르테미시아가 다른 장군들 다 머저리라고 열라 씹음.

"주인이 뛰어나면 노예가 후지고 주인이 후지면 노예가 뛰어나다는데 크세르크세스님은 엄청 위대하신가봐요. 밑에 장군들이 다 머저리에요. 다 짤라버리세요!"

-...말도 잘하네.

-그죠.ㅋㅋㅋ 옆에서들 얄미워서 죽이고 싶었겠죠.

-재밌는 여자네요.

-메데이아 저리 가라임. 이런 여자가 왜 나중에 남자한테 버림받아 자살했단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자살하기 전에 잠든 남자 두 눈알 파버리고 자살했대요.

-헐...

-근데 못 믿겠음. 절때루 자살하실 분이 아님. 뭐 걍 그만 살고 싶었을 순 있는데 남자 때문은 아닐 듯.

-그냥 남자를 죽였으면 죽였지 자살할 캐릭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름 파란만장한...

-페르시아도 그리스보단 덜 했지만 남녀차별 당연히 했는데(페르시아에선 산모가 애를 낳으면 먹을거리와 기타 수당을 줬는데 아들 낳으면 딸보다 두 배), 그럼에도 아르테미시아를 함선에 지휘관으로 태운 건,

-능력인정 ㅇㅇ

-선전효과. 그리스 니네들은 아녀자한테 질 정도로 약체다.

-푸핫..

-그리스도 너무 열 받아서 아르테미시아 생포에 엄청난 현상금.

-기분 묘할 듯.

-그럼에도 살라미스 해전 한참 후 쓰인 아리스토파네스 희곡 [리시스트라테]에도 여전히 도도한 여왕으로 등장.

-아르테미시아 주인공으로 소설도 나와 있을 듯한 느낌인데요.

-그죠. 이런 여잘 왜 여태 몰랐나 몰라.

-꽤 인기있을 캐릭터인데.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요@.@

-남편도 죽은 건지 죽인 건지 모르겠고... 하여간 그녀는 그리스인들이 지은 페르시아 악마들(?) 전당에도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답니다.:-)

-푸.. 검색해보니 서양세계최초 직업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나오네요.

-아르테미스 여신한테 따온 흔한 이름이라.. 아르테미시움이란 도시명도 흔하더라구요. 다이아나란 이름 흔한 거랑 마찬가지.   

-살라미스 해전 지고 반격 없이 철수한 게 아르테미시아 충고 받아들여서라고 헤로도토스가 주장했다네요.

-헤로도토스도 미인에 약했는갑다. 헤로도토스 웃겨요. 지가 쓴 역사책에 젤 많이 나오는 문장이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헤로도토스 <역사>도 읽어보고 싶네요. 귀여운 할아범 같음.

-재밌음. 근데 현대에 편집된 버전과 원전 같이 보는 게 잘 읽혀요.

 

 

-나 후기 따로 안 쓰고 이 카톡 대화 정리해서 올릴까부다.

-안 돼욧. 사람을 낚으려면 후기를...  

 

(저와 대화를 나눠주신 죽엽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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