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비포 선라이즈를 고등학교 때, 선셋을 사회초년생 시절, 미드나잇을 서른 넘은 유부녀가 된 지금 봤습니다.

극중 제시와 셀린은 항상 저보다 조금 어른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볼 때마다 동경 비슷한 걸 가지기도 했고요.

선라이즈에서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자유로움과 로맨스에, 선셋에서는 30대 사회인이 거둔 나름의 성공과 여유에,

그리고 미드나잇을 보면서는 '좋겠다 애들도 다 키워놨고..'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부러움을 느꼈죠;

 

전 3년 전에 결혼했는데, 당시 남편은 학생이었고 저는 대리급 직장인이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제가 생계를 책임지는 형태가 되어 당분간 아이 계획을 세울 수 없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렇게 살다보니 슬슬 이대로도 괜찮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그래도 낳아야 하지 않을까?란 고민이 시작됐죠.

극중 셀린은 제가 보기에 거의 슈퍼맘에 가까워요. 일을 하면서 시터 없이 아이(무려 쌍둥이!)를 키우고

자주 집을 비우거나 자기 일에 몰두하는 남편 대신 지금도 육아와 가사를 거의 전담(내지 반 이상)하는 듯 보이고

그 와중에 서점 직원이랑 놀아난(?) 남편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만약 두 사람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셀린은 혼자 유모차를 밀며 집 지키는 대신 북 투어에 동행하며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었을 테고

지금 겪고 있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도 좀더 쉽게 해결됐겠죠. 반대로 셀린에게 일이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겠고요.

그렇게 보육환경이 좋다는 프랑스에서도 저리 힘들다는데 여긴.. 쩜쩜쩜..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네요;

거기서도 비슷한 일 할 수 있잖아?라는 대사에선 얼마전 본 미생 에피소드가 떠오르며 제시한테 꿀밤 한 대라도 먹이고 싶어지더군요.

 

그리고 셀린이 연기하는 백치 미녀 캐릭터는 아마도 서점 직원 에밀리가 아닐까 했습니다.

셀린은 제시가 그 여자랑 잤다고 거의 심증을 굳힌 듯했고(사실 저도 그랬을 거라 생각)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안의 에밀리상을 연기해 보임으로써 제시를 골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란...

첨엔 당황한 듯 미소로 대응하다가 약간 오버하는 듯한 애정행각을 보여주는 제시의 반응도 그걸 파악하고 무마하려는 듯 보였고요.

근데 이게 또 마지막에 둘의 싸움을 어색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게 재밌었어요.

역시 부부는 가끔 의견이 안 맞더라도 유머 코드는 맞아야 같이 사는 것 같습니다 ㅎㅎ

 

암튼 유럽여행에 대한 동경과, 지구 어디편에 존재할 나의 소울 메이트라는 환상을 심어준 영화로 시작해

20년 가까이 흘러 이렇게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그래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비포 선셋을 다시 보거나 10년 후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겠죠. 한 번 더 영화관에 찾아가고 싶지만 그때를 위해 아껴두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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