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자료원 gv 후기

2013.10.30 02:28

lonegunman 조회 수:2039




올해 영상자료원에서 수퍼스타 감독님 세 분의 gv가 있었죠.

스토커 블루레이 발매 기념 박찬욱, 장화홍련 10주년 기념 김지운, 살인의 추억 10주년 기념 봉준호 감독님 gv가 그것인데요,

어쩌다 보니 방금 살인의 추억을 보고 온 것으로 세 이벤트를 다 관람하게 됐습니다. 


스토커 gv는 박찬욱 감독의 디테일한 연출적 측면의 언급들이 많아서 알찼고

장화홍련은 기술적인 측면보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많이 들려주셔서 재밌었고

살인의 추억은 짧게 인사 정도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미 소문을 들으신 분들은 아시다시피 배우와 스텝들이 총출동해서 풍성했어요.

장화홍련 때 김지운 감독이 늘어놓은 에피소드 중에 살인의 추억 관련된 게 있었는데, 두 영화가 세트를 이웃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배우 기근인 살추 배우분들이 장화홍련 세트장에 기웃거리면서 여긴 여자 있어서 좋겠다고 하니까, 김갑수씨가 아니라고, 여기도 제정신인 여자는 없다고 하셨다는.

무대에 오른 전원이 남자 배우인 살인의 추억 gv 현장에서 그 얘기가 생각나더라고요.


살인의 추억은 생각지도 못한 필름 상영이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스토커는 블루레이, 장화홍련은... 포맷이 뭐였는지 기억 안 나네요.)

노이즈 일렁이는 화면 딱 뜨는데 저도 모르게 헉, 했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진 당연하던 필름 화면이 이렇게 반갑나요.

글씨는 뭉개져 거의 안 읽히고 (사지가 썪어 죽는다 허수아비는 거의 식별 불가능), 필름 반만 걸쳐 있다가 한 발 늦게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고, 몇 컷은 날아가기도 했지만

와, 정말 좋더라고요. 필름 특유의 노이즈 낀 화면에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 아무튼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배우분들도 필름 얘기 많이 하셨어요.


많은 후기에서 언급 될, 아마 두고두고 회자될 문답은 범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두 가지 얘길 했는데,

하나는 박해일이 연기한 인물이 실제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고, 그가 죽자 연쇄살인도 같이 끝났지만, 그를 범인으로 확정짓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는.

그 말은 역으로, 그가 범인이고 범인이 이미 죽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었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범인이 살아 있을 경우, 그는 반드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거라는.

일 년 동안 자료 조사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막판에는 봉준호 감독 손으로 직접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며, 그는 과시적 성격이라 이런 이벤트를 지나칠 리 없다더군요.

지금 상영관 출입구를 봉쇄하고 관객의 머리카락과 주민등록증 싹 걷어서 조사하면 범인 바로 잡을 수 있다며 객석을 공포의 (사실은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범인의 성격이 문제가 아닌 게, 올 생각이었어도 평소에 영자원 gv를 와보지 않은 이상, 아마 티켓 못 구했을 거예요 :/


살인의 추억은 물론이고 설국열차 때도 봉준호 감독에게 늘상 반복되는 질문은 관객의 이러이러한 해석과 의미 부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건데요,

개인적으로 재밌는 건 

어떤 씬의 구도, 각도, 배치, 사운드, 미장센이 상징하는 것, 암시하는 것, 의미하는 것에 대해 언제나 대답할 말을 가지고 있고 의도한 바가 있는 쪽은 거의 언제나 박찬욱 감독 쪽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거의 무관할 정도로) 읽고, 연결하고, 해석하고 싶어하는 (실제로 그렇게 하는) 관객들은 거의 언제나 봉준호 영화의 관객들 쪽이라는 거예요. 

무 자르듯 가를 수는 없지만, 또한 뭐가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그냥 그게 재밌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번에도 재차, 박두만 범인설 등의 황당한 해석들은 의도와 무관한 해석일 뿐이라는 기존의 답을 반복하셨습니다.

이런 과하게 엇나가는 해석들에 대해 에둘러 일소하던 태도의 연장선에서, 그러한 해석이나 분석이 다 지워지는 순간이야말로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겠냐고 반문하셨죠.

그러고 보니 지난 박찬욱 감독의 gv 때도 스토커를 '인디아의 복수극'으로 보아야 한다는 정성일 평론가의 평에 대한 질문이 있었네요.

'그건 전혀 아닌데... 아,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갤 저으며 '아니, 그렇게 볼 수는 없는데.'하던 박찬욱 감독님 반응에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건축학개론 이용주 감독님이 당시 연출부 자격으로 진행 요원으로 뛰시고, 배우 박해일이 막내로 무대에 앉아 있다 밀려나는 게, 살인의 추억의 위엄이랄까 그랬습니다.

사실 애초에 gv로 기획 된 앞의 두 편과는 다르게, 영화 관계자들끼리의 기념회에 관객 입장을 허가한 형태라 오히려 이런 대규모 행사가 가능했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상영 후 대담은 앞의 두 편에 비해 미흡하기도 했지만.


중간에 여러 번 다시 보긴 했지만 대충 말하자면 어쨌건 10년만에 보는 장화홍련도, 살인의 추억도, 좋은 영화는 참 나이를 먹지 않네요.

정작 두 감독님 모두 저걸 왜 저렇게 찍었나, 못한 것들이 자꾸 눈에 보이더라는 언급을 하셨지만, 그거야 그들의 사정이고.


결론, 필름 상영은 아름다웠습니다. 영상자료원은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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