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 오디션 파행 사태를 기사로 접하고 (관련해서 올렸던 글: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page=4&document_srl=12064675)

다소 편치 않은 마음으로 송년음악회를 보러 갔습니다. 지휘자가 그만둔다면 그의 지휘로 연주되는 음악회를 보는 것도 어제가 마지막일테니까요.

연주는 괜찮았고 리신차오 지휘자 특유의 활기있는 지휘를 기대했는데, 합창 교향곡은 원래 그렇게 해왔는지 아니면 상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차분하시더군요. 대신 무척 집중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연주를 마치고 긴 박수가 끝나갈 때쯤, 갑자기 어떤 여성 분이 마이크를 들고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인데 부산 사투리가 조금 섞인 듯한 

한국말로 지휘자가 쓴 편지를 대신 낭독하더군요. 중간에 울음이 나와서 편지를 더 못읽게 되자 다른 한국인 관계자 분이 대신해서 마저 읽었습니다.

내용은 그동안 시향 단원들과 즐겁게 음악을 하면서 지내왔는데 최근 반 년동안 인격 모독이라고까지 느낄 만큼의 일들을 겪어왔고, 그래서 사임하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이 편지를 써두었는데, 그 이후로 며칠간 미처 예상치 못한 큰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이에 사의를 접고 계속 남기로

결심했다고 하더군요. 객석에서 박수가 터지고, 무대 위의 단원들이 영어로 뭔가가 적힌 종이를 일제히 꺼내 들었는데, 제가 시력이 안좋아서

적힌 내용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대략 지휘자를 지지하는 퍼포먼스였던 것 같습니다.

곧이어 지휘자가 무대에 나와 잠깐 눈물을 훔치고, 사임 편지를 작성하던 시점에 선택해뒀던 곡이라고 하면서 앵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합창교향곡 뒤에 앵콜을 연주하는 자체도 이례적인데, 앵콜곡은 모차르트 레퀴엠 중 라크리모사 더군요.

연주회를 마친 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하기도 했고요. 안내원에게 가서 무슨 일이 있는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안내원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저희도 자세히 모른다고 하고.


아무튼 관객 입장에서는 실력있는 지휘자가 그만두지 않고 계속 있는다고 하니 다행스럽네요. 리신차오 지휘자가 2009년에 삼십대의 젊은 나이로

부임한 이래로 부산시향은 연주도 좋아졌고 관객도 늘었고 단원들의 신뢰도 두텁습니다. 그가 상처받고 떠나버리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정말 미안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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