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8 23:54
옛날에는 게시판에 글도 자주 남겼던 것 같고, 글도 하루에 한 번씩 챙겨봤어요.
요즘에는 생각나면 오는데, 오늘 일주일만에 온 것 같네요.
사실 오늘 도서관에서 우연히 옛날에 발간된 키노 2002년 호도 봤어요.
키노랑 직접적으로 상관은 없지만...무의식 중에 듀나게시판을 생각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이곳에 글을 써서 가시적으로 득 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업보나 쌓는 것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간 냄새를 매우 좋아합니다.
누굴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걸 삶의 낙으로 삼죠.
그리고 오늘은 듀나게시판이 매우 그리웠습니다.
얼굴도 못 본 군중의 한 무리를 그리워한다니 참으로 기이하고 어리석은 짓이죠.
그런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나는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그 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요.
그 인간과 사랑을 하기 위해 저는 그 인간이 될 수 있는 현실 속 사람의 얼굴과 몸을 빌립니다.
서로 대화를 하고 소통을 하고 노력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은 점점 내 마음 속의 그 사람이 되어가지요.
그게 만약 안 된다면, 결국 이별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어쨌든 인간 삶에는 사람만 남는 것이고, 사람과 살기 위해 사람이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마음 속 얼굴 없는 그 사람이 내 옆의 그 사람과 닮아갈 수 있도록 최대한 틈을 벌리고자 하죠.
그는 이미 그 마음 속 그 사람과 비슷하지만 말이에요.
요즘에는 영화를 잘 보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볼 삶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영화가 한 번 볼 때 두시간이나 걸린다는 걸 아십니까?
제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제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느라 온 정신이 빼앗겼습니다.
캄캄한 밤에 놀이터에서 희미한 불빛으로 마지막을 읽어냈지요.
아침에 소설 초반을 읽으면서는 극렬한 쾌락이 쏟아져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안국역에서 극도의 피곤함을 느껴 눈을 감고 있어야 했어요.
글의 잔상이 당신을 괴롭힙니다.
그건 매우 힘들어요.
어찌 되었든, '인간실격'보다 작품성은 떨어질지라도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왜 좋은지 언어화, 즉 설명은 안 되지만요.
사실 '인간실격'도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뭘 봐도 쉽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제 눈에 먼저 이미지가 다가옵니다.
저수지에서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가 새 한 마리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제 마음에 둥지를 틀어버리고 나가지도 않으며 저를 괴롭히네요.
어찌 되었든 가을은 왔습니다.
2016.09.29 00:05
2016.09.29 01:45
소설 <사양>의 한자는 斜陽(비낄 사, 볕 양)이네요. - 1. 해 질 무렵에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
2. 새로 나타나는 것에 밀려서 낡은 것이 점점 몰락하여 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컴퓨터 '사양'은 仕樣(섬길 사, 모양 양) - 물품을 만들 때 필요한 설계 규정이나 제조 방법
사양하다의 '사양'은 辭讓(말씀 사, 사양할 양) 1. 겸손하여 응하지 않거나 받지 않음, 2. 또는 남에게 양보함
비밀의 청춘 님 반가워서 괜히 한자 공부해 봤어요. ^^
2016.09.29 12:29
사양이 제가 읽었던 그 작품인지 잘 모르겠는데...주인공이 어머니를 말할때 수프를 마시는 장면을 묘사한게 머리에 늘 남아있어요. 그 수저쓰는 방식요. 우아하게 후루룩마시는 모습.
사양이 아닌가???..읽은지 십여년도 지나 가물가물...근데 왜 그 장면만 기억에 그려지듯이 남은건지 생각 좀 해봐야겠어요. 뭐 생각한다고 뾰족히 알게될거같진 않지만.
사람을 좋아한다고 자유롭게 표현할수 있는 분이 부럽습니다. 부럽다는 표현 함부로 쓰는건 아니지만요.
2016.09.29 12:53
한때는 내가 금사빠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쉽게 좋아할 수는 있어도 쉽게 사랑할 수는 없더군요. 아주 적은 사람들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어릴 때처럼 많은 책과 많은 영화가 필요하지 않더군요. 어떤 면에서는 이게 정체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대신 아주 깊게 다가오긴 하더군요. 그래서 사양을 읽은 후 느낀 감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2016.09.29 13:11
읽는 내내 답답하고 숨이 막혔던 소설이었는데...
2016.09.29 14:28
김전일 / 그러면 저야 좋죠.
underground / 지는 해, 라는 뜻으로 기억합니다.
쇠부엉이 / 네, 맞아요. 도입부가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사람을 좋아한다고 자유롭게 표현해서 피도 여러 번 심하게 봤답니다.
푸른나무 / 요새 제 생각과 딱 같네요. 저도 제가 금사빠인 줄 알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삶의 다른 말이 사랑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공상의 가능성이 내 삶의 가능성이기도 해서 많은 것들이 필요했습니다만, 이제는 선이 그어진 저만의 삶이 있어서 거기에 겹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 겹쳐져 있는 책과 영화를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Quadling / 저도 읽으면서 목을 벅벅 긁고 싶었답니다.
2016.09.29 15:48
사춘기 때 보고 너무 좋았죠.
이제 다시 보기가 약간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와 번역의 차이도 있겠고 그때가 날 몰라볼까 싶기도 하고요.
2016.09.29 23:24
저도 비밀의 청춘님 댓글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이분도 곧 출판사에서 책 한 번 내보자고 연락 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