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곰TV에서 영화 <쉘 위 댄스>를 봤어요. 

1996년 영화니까 거의 20년 전 영화이고, 춤을 배우면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영화는 그동안 제법 봐왔던 터라 

이 영화에서 특별한 감동을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냥 문득 궁금해졌던 것 같아요. 

이런 댄스스포츠를 다루는 영화가 90년대에는 흔하지 않아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걸까, 

아니면 지금 봐도 뭔가 마음을 흔드는 게 있을까.

 

내용은 평범했어요. 중년이 된 회사원이 결혼 15년째에 접어들어 아이도 웬만큼 키웠고 집도 대출 받아 샀는데 

앞으로도 줄기차게 회사에 충성하고 은행 빚 갚으며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맥이 빠지는 거죠. 

그가 타고 다니는 퇴근 전철은 언제나 어느 댄스 교습소 앞을 지나는데 그 시간엔 항상 그곳의 창문에서 어떤 여인의 모습이 보여요.

그 모습에 끌려 그는 그 댄스 교습소를 찾아가 춤을 배우기 시작하고, 열심히 연습해서 대회에 나가고, 

그렇게 예상가능한 스토리가 진행되고요.

 

그런데 이 영화가 단지 춤에 대한 열정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이 남자는 댄스 교습소에 있던 그 여자와 단 한 번이라도 춤추고 싶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느새 그는 춤을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지만 춤을 향한 그의 열망은 그 작은 바람으로 시작되었죠. 

그러나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춤을 잘 추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는 여전히 다가갈 수 없는 동경의 대상으로 남아있고요. 

그는 나름 실력을 쌓아 대회에도 나가지만 어떤 사건 때문에 춤을 그만두기로 결심해요. 

그러다 그녀가 외국으로 떠나게 되어 송별회 겸 댄스 파티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지만 그는 그 송별회에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는 결국 그 댄스 파티에 가서 그녀와 함께 소원하던 춤을 추게 될까요, 아니면 그저 묵묵히 그녀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을까요?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이 시점에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릴게요. ^^)

 

 

 


 

 

 

이 남자는 끝까지 관객의 애를 태우지만 결국 댄스 파티에 참석해서 그녀와 춤을 춰요. 

그녀와 단 한 번의 춤이었지만 그에게는 충분했을 거예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도, 앞으로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어도, 그가 다시 춤을 추지 않게 되더라도요. 

그녀와 춤추기 위해 그가 첫 발을 내딛던 순간 시간은 잠시 멈추었을 테고 그 영원 같은 순간 속에서 

그는 이걸로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느꼈을 테지요. 

어쩌면 그는 그녀를 그렇게 열렬히 사모했던 건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삶에 지쳐 있었던 그에게 그녀는 꿈꾸게 하는 사람, 춤이라는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가 주는 사람, 

그의 마음 속에서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려주는 사람이었겠지요. 

그는 사랑이라기보다는 한없는 그리움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아요. 

다다를 수 없는 아름다운 곳을 향한 그리움이요. 

그녀와 춤추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는 그 지극한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었을 테고요.

 

사랑이, 열정이, 삶에서 해결해 주는 건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건 결국 자신의 손으로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겠죠. 

그녀는 그의 속에서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려주는 기름의 역할을 한 것뿐이었는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녀 덕분에 그는 잠시 아름다운 춤의 세계로 건너가 그 속에서 온갖 근심을 잊고 황홀해 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건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지쳐있을 때 누군가 나의 손을 잡고 잠깐 아름다운 세계로 날아가 주길, 그 속에서 꺼져가는 내 안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길, 

그리고 그 지극한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온갖 근심을 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길. 

내 삶의 어느 순간을 그런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그걸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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