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평행우주2)

2016.07.31 10:52

여은성 조회 수:889


  1.어느날의 이야기 시리즈는 이런저런 잡담 시리즈나 여러가지 잡담 시리즈와 별개니...도배는 아닌 걸로 하죠. 평행우주1편에서 이어져요. 3편으로 나눌까 하다가 중간에 있던 일들을 조금 지우고 이번 2편으로 끝내는데 역시 기네요.

 

 

 2.그 날은 그렇게 마무리하고 다다음 날엔가 그곳에 또 갔어요. 사실 이보다 덜 대접받았어도 두번째 쯤 가면 무언가는 하나 팔아 주게 돼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냥 다시 맥주 한 병을 시켰어요. 나도 모르게 말이죠. 아마 그 날 느꼈던 기분을 조금 더 느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여자는 다른 테이블을 보다가 주방에 가서 땅콩을 좀 집어다 내 앞에 갖다놔 줬어요. 


 나는 결벽증은 아니지만 꽤나 가리는 게 심해요. 그 땅콩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아무래도 안주로 한번 나갔던 걸 재탕한 것 같았어요. 



 3.하지만 나는 신경질을 내는 대신 그 땅콩을 그냥 먹었어요. 그것도 전부 다요. 땅콩을 다 먹은 걸 흘끗 본 여자는 다시 새로 땅콩을 가져다 줬어요. 


 12시가 지날 때쯤 역시 테이블이 다 빠지고 나만 남게 됐어요. 여자가 다시 내 앞에 와서 앉았는데 이번엔 그냥 자신이 먹을 맥주를 가져왔어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냥 내가 마시고 싶어서 가져온 거야'라고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어요. 메뉴판 구경을 좀 시켜달라고 하자 심심한가 보다라고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왔어요. 


 메뉴판의 술들은 완전 쌌어요. 18년 가격은 강남의 15년 가격이고 15년 가격은 강남의 12년 가격 정도였어요. 블렌디드 위스키들도 거의 3분의2정도의 가격이었어요. 나도 모르게 '이래가지고 돈을 벌겠나'라고 중얼거렸는데 여자가 뭐 좀 팔아주려고 그러냐고 하며 대충 ㅇㅅㅇ같은 표정을 지었어요. M18년을 먹자고 하자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M18년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럼 아무걸로라도 18년으로 가져오라고 하자 '여긴 18년 안 갔다놔. 찾는 사람이 없으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그럼 있지도 않은 18년을 왜 메뉴판에 써놨냐고 하니 '나도 몰라'란 대답이 돌아왔어요.


 휴.


 그래서 그럼 뭐라도 15년을 가져오라고 하니 M15년을 가져왔어요. M15년은 파인오크라 안먹는다고 하니 한숨을 쉬며 한참동안 찬장을 뒤지다가 피딕 15년을 찾아서 가지고 와서 내 앞에 놓았어요. 



 4.휴.



 5.이쯤 해서 궁금증이 들었어요. 왜 제일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는지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돈 있는지 없는지 안 물어봐?'


 하자 여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김치공장 얘기 그거 거짓말인 거 알아.'라고 대답했어요. 원래대로라면 '그런데 웬 반말이지?'라고 했겠지만 호기심 때문에 그건 미뤄뒀어요.


 '어떻게 거짓말인 줄 알아?'라고 하자 여자가 말했어요. 이건 한 글자 한 글자 똑똑이 기억나요.


 '손 보면 알잖아.' 


  

 6.보통은 그래요. 바틀을 시키면 빠르면 1시간...길어야 2시간 정도면 바닥이 나죠. 그리고 다음 바틀을 시키고 뭐 이런 식으로 술이 술술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곳에서 처음 알았어요. 술은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요. 술은 마셔야만 사라진다는 걸 말이죠. 그동안 나는 내 주량이 위스키 3병(700ml기준)+샴페인 1병 이상인줄 알고 있었어요. 어딘가에 가서 주량을 얘기할 때마다 위스키 3병 이상이라고 하면 다들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어요. 그런데 내가 너무나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하니-왜냐면 3병이 늘 사라지니까요-다들 반박은 하지 않았죠.


 한데 내 주량을 제대로 확인해 보니 3병은 커녕 1병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구역질을 참으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사라진 술들을 마신 건 내가 아니라 직원들이었던 거예요. 어쨌든 내가 킾은 절대 남기지 않는다고 미리 말을 해뒀기 때문에 둘이서 간신히 1병을 다 비웠어요. 다음에는 18년을 가져다 놓으라고 하고 헤어졌어요.



 7.며칠 후에 다시 갔는데 18년 위스키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15년이나 또 먹자고 하니 '나 위스키 싫어. 맥주나 먹자.'라는 말이 돌아왔어요. 매상을 올리는 데 관심없냐고 하자 사실 사장은 따로 있고 자신은 여기 사장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곳 매상을 올려주는 건 고맙지만 그래도 위스키를 먹는 건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하며 그냥 맥주를 먹자고 했어요. 나는 맥주를 먹지 않기 때문에 마시는 건 여자가 하고 나는 홀짝거리기 시작했어요.


 여자는 기네스만을 계속 먹었는데 어느덧 8병 정도 먹게 됐어요. 그걸 보고 있자니 너무 궁금해서 기네스가 그렇게 맛있는 맥주냐고 하자 '사실은 이게 마진이 제일 많이 남아.'라고 대답했어요.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기네스를 마진 때문에 계속 먹고 있는 중이냐고 하자 '아냐아냐. 그래도 요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어.'라고 말하며 씨익 웃었어요. 


 지금도 가끔 여자 앞에 잔뜩 쌓인 빈 기네스 병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씨익 웃는 표정을 마음의 액자 안에 담아놓고 가끔씩 떠올리곤 해요. 내 마음 안에서는 그것이 강함이라는 단어를 형상화시킨 모습들 중 하나예요.



 8.여자의 말버릇은 '나 3000만원 모았어'였어요. 그냥 잊을 만 하면 가만히 있다가도 그 말을 꺼내곤 했어요. 아마 그것이 나름대로의 자부심인가보다 싶어서 그럴 때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줬어요.


 나는 어디에 가든 거의 주식 종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요. 특히 술집에서는요. 나는 돈을 쓰러 가는 건데 뭐하러 남들에게 돈을 벌게 만들어 주겠어요? 아무리 끈질기게 물어와도 대답하지 않기로 작정한 건 대답하지 않아요. 내가 술집에서 주식 얘기를 꺼낸 건 단 두번이예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여자고요. 그것도 리액션으로서가 아니라 직접 내가 먼저 꺼낸 건 유일해요.


 어느날 '정말 거의 확실'한 것이 있어서 여자에게 말했어요. 3000만원으로 이러이러한 주식을 사라고요. 그럴 리는 거의 없겠지만 만약에 그게 떨어진다면 내가 손해분을 메꿔 주겠다고까지 했어요. 여자는 '주식 그거 도박 아니야'고 했어요. 나는 주식은 절대로 도박이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여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어요.


 '나 이제 그런 거 안 믿어.'


 라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저 말에서 '이제'라는 말만 없었어도 몇 번에 걸쳐 설득을 시도했겠지만 저 말에 들어있는 '이제'라는 말이 그냥 나를 너무 슬프게 했어요. 



 9.이 글의 테마는 무엇일까...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분들을 위해 말해보자면, 건방짐이예요. 건방짐에 대해 말하려고 이 긴 글을 이렇게 열심히 썼어요. 나는 멋대로 누군가에게 이상한 색채를 덧씌워 연민을 가지곤 했지만 그녀를 만나고 난 뒤론 묵묵히 자신의 전쟁을 잘 치러내는 사람들에게 나따위의 연민은 가소롭고 건방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그들을 가여워하는 건 사실 그들을 가엾어하는 게 아니라 만약 그곳에 있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나를 가여워하는 것 뿐이었다는 걸요. 그들은 잠깐씩 침울해하곤 하지만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전쟁을 끝까지 치뤄내기 때문에 나의 연민같은 건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그들은 내가 아니니까요.



 10.하나의 사이클이 지나가고 한 사장과 그녀에 대한 대화를 나눴어요. 주식 투자를 권했던 얘기가 나오자 사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어요.


 '그 아이가 모았다던 3000만원은 아마 그 아이가 살던 집의 보증금이었을 거야. 은성씨, 어떤 사람이 3000만원을 모았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이 현금 3000만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11.나는 다른 어른의 행운따위는 빌지 않지만 그녀와 그녀의 3000만원만은 잘 있기를 바래요. 아마도 이번 우주가 끝나면 또다른 형상과 기성을 갖춰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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