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젝트를 끝내며 반 년만에 회사 동료들과 만나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밝은 얼굴로 dpf가 중얼거리더군요. "이미 어딘가엔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 있겠지? 순식간에 단풍이 밀려올거야."
순간 저는 그가 '묘사'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적어도 하루보다는 커다란 것, 사소함을 소작하는 일상 속의 긴박한 몰입보다는 커다란 어떤 것을요. 왜냐하면 코스모스가 피고 단풍이 드는 것은 일상의 정면 풍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풍경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공간이 존재하든지, 생겨나야만 하죠.
아직 없거나 비낀 각도의 풍경을 환하게 발음해볼 때, 그때 인간은 스스로를 연민하게 되는 걸까요? 만약 제가 '넌 너 자신을 연민하고 있니?'라고 물었다면 dpf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지경은 이미 오래 전에 넘어섰지.'

묘사는 바라본 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새로운 시선을 감지하는 일은 그런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죠. 삶을 바라보는 동안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묘사되는 그 순간에.  ('묘사'라고 해서 작가나 화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닙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런 순간에 상대의 외로움을 감지합니다.  외로움이란 시선의 차단이 아니라, 바라봄의 바라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딘가엔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 있겠지? 순식간에 단풍이 밀려올거야."

우리는 삶이라고 불리는 일상 속에 있습니다. 바로 그 일상의 함몰에 대한 대항에서 '넓이'의 긴요함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즉 일상의 소소한 날카로움과 슬픔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뻗쳐 누구든 해하게 될까 염려하기 때문에 '넓이' 를 묘사하게 되는 거라는 것.  무엇을 묘사한다는 건  이런 사정, 이런 임무를 가지고 있는 거라는 것. 
그러므로 묘사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covid 19와 제가 당한 교통사고로 서로 격리되어 있는 동안 어쩌면 dpf는 '묘사'에 집중하는 외로운 시간을 살았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합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베지 않기 위해서요.

# 옛일기를 들춰보면 '오늘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식의 문장만 쓰여 있는 페이지가 더러 있습니다. 과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라는 게 가능할까요? 제가 그런 식으로 쓴 것은 과정을 분절시키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어떤 일'들을 긴 언덕을 걸어 올라왔다거나 걸어 내려갔다 라고 쓰고 말았던 것이죠.  왜 저는 그 중간에 일어난 과정을 묘사하지 않았을까요.

'긴 언덕'을 백 미터 정도의 길이라고 가정할 때, 사춘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 언덕길에서의 오르내림을 하나의 단위로 써왔습니다.  저에게 언덕길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단위였으니까요. 왜냐하면 언덕길은 제가 그 길에 들어서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그냥 하나의 언덕길 그 자체이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게 '언덕길'은 더 이상 세분되고 분절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덕길'을 분해하면, 실은 그것 역시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서 이루어진 복합적인 체험의 시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저는 언덕길을 더 '분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길의 왼쪽은 건물들의 벽이 지나치게 가깝게 있었고, 오른쪽은 제가 선 위치에 따라 민감하게 변할 이유가 없는 먼 풍경들로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덕길은 복도처럼 출구와 입구가 명확해서, 제가 다른 길로 들어설 가능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언덕길 같은 구조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저를 상당히 정태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합니다.  묘사하지 않은 하루엔 다른 행위나 의미의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는 수동적인 상태에서의 편안함이 있었을 테죠. 하루를 '하나의 길'로 물질화해 은유함으로써 최면을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언덕길'의 코스모스와 단풍을 묘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듀게에 괴발개발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걸 위해서이기도 해요. - -)
묘사하지 않으면 코스모스와 단풍이라는 존재가 지워지며 세상이 좁아질 것입니다.  
파스테르나크가 말했던가요? 자신 속에 공간의 외로운 존재들을 하나씩 새기는 일이 미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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