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5 03:10
어렸을때 영화 좋아하는 친구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비디오로 빌려와서 같이 봤었습니다.
보다가 졸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진 못했지만, 좋은 영화라는 건 알겠더군요. 솔직히 본 일 자체가 오래돼서 언제부터 졸았는지도 기억이 안나요.
그래도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 몇개가, 수용소 담을 넘으려다 잡혀서 몽둥이로 맞아죽는 유태인, 침묵하며 지나치다 소리죽여 울음을 터뜨리는 주인공,
폐허같은 곳에서 만난 독일군 장교 앞에서 보이는 피아노 연주 정도..
그러다가 가물가물 잠들었는데, 언제 깼냐면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 연주하면서 영화 막 내리는 장면이요.
아 어찌어찌 탈출했나보다 살아남았나보다 그러면서, 그냥 연주 들으면서 그렇게 끝나는 장면을 봤습니다.
좋은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그때 들더군요. 거진 반은 넘게 놓친 주제에 뭔 소리냐 싶지만ㅎ 그냥 그랬습니다. 아 좋네. 마음에 남네 했지요.
찾아보고 싶은 스타일은 아니었어서(원래 좀 어렵나 싶으면 쉽게 안봅니다) 다시 본적도 없고, 감독의 다른 작품을 본 일도 없습니다.
어쩌다 2차대전 유태인 학살 관련 다큐같은거 볼때 위에 말한 영화 장면 몇개가 슬쩍 스치는 정도?
그렇게 영화가 기억에 옅게 남은 정도로 지나갔기에 감독의 범죄행위에 대해 알게 된 건 제법 최근의 일이 되었습니다. 꽤 충격적이었죠. 덤으로 알게된 감독의 다른 인생사를 보니 참 이렇게 기구한 사람이 다있나 싶었습니다.
몇몇 영화인들이 감독에 대해 옹호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전 그럴수 있다 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법적인 면죄를 요구하는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영화는 잘만들어요" 정도라면 못돼먹은 생각까지는 아니라고 보는거죠. 이해는 거기까지고, 전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영화가 어떻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감독의 범죄를 들어 작품들까지도 까내리고 싶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끔찍한 아동성범죄자의 작품을 예술로 볼 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이요.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그럴수 있다 싶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위의 주장보다 더 설득력이 있지요.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가 이미 본 영화가 좋게 기억에 남았으니까요. 사람이 어떻든, 영화는 저에게 울림이 있었습니다.
범죄자가 법망을 피해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찍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는다.. 마음에 안드는 이야깁니다. 그래서 저 또한 더더욱 이 감독의 영화를 안 찾아보게 됐죠. 봤는데 좋은 작품이면 찜찜할테고, 안좋으면 그건 그거대로 시간낭비고.
그런데 어쩌다, 감독을 모른채로 오씨엔에서 틀어주는 아무 영화나 봤는데, 그리고 좋았는데, 그게 이 감독 영화라면.. 전 그냥 좋은 영화다 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찜찜은 하겠지만요.
누군가가 그 영화는 나쁜 영화야 라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들어볼 용의가 있고, 난 이런게 좋았다, 넌 그런게 안좋았구나,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것같아요.
그 영화 감독이 아주 나쁜 사람이야 라고 말한다면, 어 나도 알아 라고 할것같습니다. 근데 영화는 좋더라. 거기까지인거죠. 감독은 개새낀데 영화는 좋더라. 기분은 찜찜하네. 여기까지.
밑에 있는 김훈 작가 한남 글을 보니 생각이 나서 적어봅니다.
전 김훈 작가의 글을 무척 좋아합니다. 누가 같이 그 사람 소설에 대해 얘기하자 하면 한참 즐겁게 같이 얘기할 수 있을겁니다.
이를테면, 남한산성 속의 최명길의 묘사가, 작가 자신의 권력 앞에 엎드렸던 경험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냐는 뉘앙스의 말에 대해서는, 제 기억에 최명길이 쓴 서신에 홍타이지가 격분하는 장면부터 해서, 최명길에게 동정적이었으면 동정적이었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작중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단지 제 감상일 수도 있겠지요.
다만 제가 기억하는 소설 속의 분위기로는 이래요. 이름은 기억이 안나고 김상헌이 "조선 모든 무관이 자네와 같았다면 오늘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는 투로 칭찬하는 무관이 한명 있는데, 작중에서 이렇게 긍정적인 평을 받은 건 이 사람 하나였던것 같아요.
말은 실속있는 말만 하고 자기 자리에서 맡은바 할 일을 묵묵히 챙기는 사람으로 묘사가 됩니다. 이 점을 봐도 작 중 "말 많이 하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는 더 덧붙일 것이 없을듯 합니다.
자신의 정권찬양 경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을 자기 작품 속에서 무력한 집단으로 묘사되는 문신들의 한 축인 최명길에 투영되도록 그렇게 그렸다.. 공감은 가지 않습니다만 다시 읽어보면 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긍정보단 동정의 시선으로, 라고 한다면 말이 안될것도 없네요.
그런데 한남 작가라서 싫다...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작가의 다른 글을 굳이 찾아보지 않으실테고, 저랑 같이 그 사람 글에 대해 얘기 나눌 일도 없을테고요.
혹은 글 자체에 한남의 기조가 흐른다, 여성 억압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사상이 글에 만연해서 읽을 수 없다, 좋은 글이 아니다, 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본 동 작가의 글 칼의노래, 남한산성, 공무도하, 개 그 어떤 작품에서도 전 한남의 냄새를 맡지를 못했습니다. 언니의 폐경은 안봐서 모르겠어요. 그건 그럴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게 한남 소설이라서, 그러므로 한남 작가이고, 그러므로 나머지 글도 한남 소설이라고 하신다면, 전 그 생각은 거부할게요.
그래도 최소한 제가 알고있는 칼의노래, 남한산성, 공무도하, 개 이 글들을 가지고도 작품 자체가 한남소설이라고 한다면 전 열심히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한때 병신 기사로 이름높았던 mbc뉴스 "팔뚝 굵으면 우파" 기사의 논리처럼 이상한 껀덕지로 한남 낙인찍는것만 아니라면야, 어떤 납득할만한, 타당한 이유로 이 소설의 논조가 여성억압적이며, 남성우월적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얘기해주세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그런건 대화가 가능한 영역이니까요.
2017.12.25 03:48
2017.12.25 03:55
2017.12.25 04:43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김훈은 소설에서 여자 캐릭터를 다루는데 엉망이어서 되도록이면 등장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언니의 폐경이란 작품은 참 끔찍하군요. 이해할 생각도 없으면서 캐릭터를 다룬다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죠.
근데...
하나의 관점으로 작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작가를 몰이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중에서 어떤 특정 대목이나 어떤 특정 사건을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이해한다는게 가능할까요?
김훈의 대표 한남작가라고 주장하는 글이 얼마나 작가에 대해서 몰이해 하고 있다는게 느껴지네요.
요즘 이 곳에 올라오는 몇몇 글들은...
휴~
모든 잣대를 하나의 시선에서 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우스운건지 잘 모르시나봐요.
그리고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은 왜 혐을 조장할까요?
혐을 조장해서 얻는 건 뭘까요?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까지 돌겠네요.
좋은 한남은 죽은 한남이라고요.
(참고로 이 문구는 유럽인이 유태인에게 썼던 말입니다.)
요즘은 페미니스트라기 보다 혐오론자라는 말이 더 맞는 듯 싶네요.
2017.12.25 11:16
2017.12.26 16:13
혐을 조장하는건 어떤 이유든지 변명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니 불평등한 상황에서는 혐이 무기가 될 수 있다니 하는 말은 다 헛소리입니다.
일베가 자신을 숨기는 테러리스트라면 메갈은 자신을 들어내는 테러리스트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말하죠.
성희롱, 강간,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남자 모두인가요?
우리가 원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걸 강요하는 것이 잘못 아닌가요?
혐을 조장하는 것은 인정하셨으니...
그래도 한발 진일보하셨네요.
2017.12.25 05:02
관련된 이슈들이 좀 있는모양이더군요.
언니의 폐경에 드러난 그 묘사는 멍청하다손 쳐도.
그게 남성들로만 이뤄진 심사위원과 함께 황순원문학상을 받다는 점에서 1차적인 공분을 샀던것 같고.
관련된 이런저런 비판에 작가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것 까지는 되는데 인격체로 묘사하는데는 서툴다.편견은 아니다"
여러모로 분노하기 딱 좋은 워딩이죠.
2017.12.25 09:17
2017.12.25 12:43
2017.12.25 20:51
걱정마세요.
작가의 사상이나 그 인생의 행적에 대해 얘기하는건, 그나마 해당 작가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 이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바람직하게도(?),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대부분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만이 남게됩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는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사람들이나 아는 배경지식 정도로나 남지요. 그래서 자신의 작품과 그닥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 수많은 창작가들이, 지금껏 멀쩡히 그 작품과 이름을 남기고 있는거고요.
제 의견 따위 김훈이란 작가의 작품과 명성에 먼지 한 톨 만큼도 영향을 끼칠 일이 없습니다. 친일 인명사전은 있지만 친독재 인명사전은 없고, 반 성평등 인명사전도 없으니, 작가 김훈은 그 어떤 불명예스러운 명단에도 이름을 올릴 일이 없지요.
하지만 김훈 씨 말 빌리면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거든요. 김훈이란 사람의 성의식에 대해 알게된 이상 언니의 폐경 같은 소설을 작품으로만 읽을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살아온 행적을 알게 된 이상 특유의 '산 사람은 살아야지' 식의 정서가 단지 삶의 비루함과 애환을 그리는 것이라고만 느낄 수 있을지, 박범신이 은교 역을 맡은 영화배우한테 '너 내 은교 해라' 따위의 말을 실제로 했다는 것을 알고서도 은교를 순수한 작품적 시각으로만 볼 수 있을지, 저는 그게 안돼서 말이죠.
음악이나 미술같은 장르는 소리나 시각으로 치환이라도 되지, 글이란건 넘나 직방적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