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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클라이맥스의 유치함을 지적합니다. 사실 저도 보면서 그 장면이 조금 낯간지럽기는 했고요. 그럼에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놀라운 성취를 저는 제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결말이 얼마나 똑부러지게 꺾어지느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에 다다르기까지의 원만한 여정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 재미만이 아니라 현실의 투쟁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떤 포기를 강요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지, 주제의식과 딱맞게 결부되는 이야기의 형식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맞닥뜨리고, 싸우고, 쓰러트리고 끝나는 편리한 이야기는 현실에 없으니까요. <삼진그룹 토익영어반>은 히어로물의 공식에서 벗어나 현실적 분위기를 담으려하는 영화라고 봐줘야 할 것입니다.


제가 놀랬던 부분은 백현진씨가 연기했던 상무 캐릭터를 이 영화가 다루는 방식입니다. 하이톤의 쇳소리를 내고, 대문짝만하게 찍은 자기 사진을 사무실에 걸어놓고, 직원들 앞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그는 누가 봐도 이 영화의 주된 악역입니다. 비교적 중반쯤에 밝혀지는 그의 폐수 방류는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고 이제 그의 자백이든 증거든 뭐든 잡아서 그를 잡아넣기만 하면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절대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오. 그가 나쁜 사람인가? 그런 부분도 있죠. 자본을 등에 업은, 생각없는 낙하산 재벌 2세를 단죄하는데는 더없이 좋은 그림이겠지만 영화는 그를 그 틀에 가두지 않습니다. 그가 폐수를 방류한 건 맞고 생각없는 사업가도 맞지만 그게 모든 걸 다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전화를 하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대체 누가 조작된 보고서를 나한테 올린거야... 그는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도덕적 실패가 그의 전인격적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인 건 여전하지만 어딘지 짠내가 좀 납니다. 그는 거악이 될 수 조차 없는 인간인거죠.


그러니까 토익반 삼총사는 사건을 캐고 캐다가 이 폐수 방류가 은폐되고 제보되는 일련의 과정이 미국인 경영자의 계획이었다는 걸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삼총사는 어떻게 하느냐. 무려 백현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기업을 살리고 그 미국인을 몰아내자는 명목으로요. 이것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타짜 같은 세계관이 아니라 그 괴상하고 못나보이는 악덕 경영자조차도 기업 자체의 생존과 발전을 함께 도모할 여지는 있는, 인간적 아군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는 묘사입니다. 이 영화에는 전형적 악인이 없습니다. 백현진 혼자 폐수 방류라는 나쁜 짓을 했는가. 아닙니다. 폐수의 페놀 수치를 조사의뢰하고 조작한 것은 박혜수와 함께 일했던 사람 좋은 그 상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숨겨진 악의 편이었나. 그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인간을 그렇게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악을 처부수는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적의 악당으로 그려놓는 게 아니라 위치와 권력이 주어졌지만 결코 완벽해질 수 없고 나약한 인간으로 이들을 그립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악당을 응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든 벌어진 사태에 책임을 지려는 선량한 사람들이 고군분투로 더 이어집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희망입니다. 그 악하고 말 안통할 것 같은 인간도 개선의 희망이 있고 연대의 가능성이 있다는, 영화가 현실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을 미워하고 끝내는 납작한 사이다 서사가 아니라 필요할 때는 손잡고 용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해하는 한결 어려운 심정적 과제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 반전은 성장드라마 그 자체입니다. 관객이 목격한 첫인상 그대로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계속 새로운 정보를 통해 배워나가면서 기존에 쌓아두었던 감정과 호감을 어떻게든 더 나중 시간대의 선택과 결부해 받아들여야하는 과정이니까요. 넌 나쁜 놈. 넌 미운 놈. 이 삼총사는 그런 식으로 단죄하거나 편먹기를 하면서 나아가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고아성의 후배 상사인 그 대리에게도 영화는 등짝 한대 맞고 정신 차릴 기회를 줍니다. 이것은 그 대리에게 응징 아니면 어쩔 수없는 크기의 권력을 쥐어주는 걸 방지하면서, 그가 돌아올 길 없는 악한으로 전락하는 이야기 대신 다시 친구가 되고 한번 혼낸 다음에는 이 전처럼 잘 지낼 수 있는 그런 세계를 완성해나가는 전개입니다. 인간들이 구조의 사악함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이들 역시도 어쩔 수 없는 회사원에 구조에 종속된 존재라는 걸 상기시키고 본질적으로는 회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는 고아성과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자아성찰이기도 하죠. 훌륭하고 완전한 인물이 이야기 전체를 계도하면서 이분법적 선을 굳건히 기립시키는 이야기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고아성의 자영은 그런 이야기가 아예 불가능한 캐릭터입니다. 그 역시도 회사의 편에서 사람들을 속인 전과가 있으니까요. 잘못된 과거와의 화해는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상기하면서도 그를 바른 길로 다시 인도할 수 있는, 그 포기하지 않는 믿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과정적 투쟁이 갑자기 시원한 민주빠따로 합쳐져버리는 결말이 더 아쉬운 거죠. 상업영화다보니 한방은 필요했겠지만, 회장님을 등에 업고 개미 투자자들의 수많은 합의 아래 외국 투자자를 물리치는 모습은 기존의 저항에 대한 자가당착같기도 합니다. 결국 애국의 함정에서는 못벗어난 느낌이지만, 그래도 어떻습니까. 저는 이렇게 차곡차곡, 자빠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투쟁을 지속하는 영화를 아주 오랜만에 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아주 한국적인 것 같습니다. 근면성실! 인맥! 이런 데서 그 한국적인 면모가 쓰인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투쟁은 훨씬 더 생활에 가깝고 정의는 아주 거창한 게 아니라 사람은 죽이기 싫다는 양심 한조각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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