짦고 소중한 시간들.

2020.11.09 19:49

잔인한오후 조회 수:788

열차 바깥으로 지나가는 풍경처럼, 힘들고 싫은 시간도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도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떤 일거리를 받았을 때 예전에는 하루하루 그 일을 하느라 버텨내야 할 시간들이 문제였다면, 요즘에는 그 기한이 빠르게 줄어들어 터무니없이 적게 느껴져 문제입니다. 지금 수능을 본다해도, 고등학교 때 느꼈던 그 길고긴 야간자습을 느끼진 못하겠죠.


우연하게 2주 전 쯔음 애인이 TV를 돌리는걸 보다가, 정기적인 캐이블 채널 중 한 곳에서 요가를 하는걸 보았습니다. 과거 대략 1년 정도 요가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최근 몸이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마음에 저걸 하면 되겠거니 시작해서 매일 같이 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저녁 8시부터 한 시간입니다. 그렇게 미묘한 시간대에 살짝 끼다 보니 앞뒤 시간들이 더 소중해지더군요. 집에 와서 밥먹고 어쩌고 하면 7시가 되어 소중한 1시간을 발을 동동 굴리며 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금방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고, 씻고 나면 어영부영 9시 20분 쯤, 11시까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솔직히 2시간 누구 코에 붙이나요.


밤을 깊게 파나가다 보면 1시, 2시, 3시. 다음 날 출근이니까 그나마 1시까지는 안정선이지만 그 이후로는 몸을 배배꼬면서 이가 썩을 줄 알면서 달디단 것들을 양치도 하지 않으며 먹는 기분을 느끼지요. 그러다 보니 시간을 내는 글을 쓰기도 힘들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습니다. 없었을 때는 7시부터는 시간을 가을에 부는 바람처럼 보내다가 정신차리면 아무것도 없이 내일을 위해 눈을 감아야 되었다면, 요새는 그 간격이 딱딱한 벽돌처럼 느껴지네요. 오늘도 한자 한자에 한걸음 한걸음 몸을 고문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등이 써늘해지네요.


왠지 오래전부터 근력보다 유연성을 얻고 싶었어요. 기동이 잘 되지 않는 근육들과 각도가 좁혀지는 관절들을 바라보다 보면, 그런 시기를 최대한 밀어놓고 싶게 되거든요. 그리고 하다보면 마치 근손실마냥 연손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쪽도 마찬가지로, 하루에 잔뜩 한다고 순식간에 오징어가 될 수 있는게 아니라, 매일 매일 일 밀리 일 밀리 나아가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을, 꾸준함을 통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겠죠. 투자한 만큼의 정직함이요.


최근 문득 내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글을 마감하고, 그 글을 사주는 사람들에게 파는 이에 대한 티비 프로였는데, '의외로 저런 일이 매일 같이 하다 보면 어렵지 않아'라는 식으로 그 이를 깍아 내리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곤 꽤 부끄러웠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런 상황까지 도달하는 것도 어렵다는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쎄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없지만, 글을 잘 써보이고 싶다는 감정은 있는 것인지. 욕심이 딱히 없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욕심은 어떤 욕심인지 생각하게 되더군요.


벌써 다음 년도의 다이어리를 사야될 시기가 왔더군요. 3년째 같은 다이어리를 썼는데, 올해 다이어리를 거의 채우지 못해서 내년에는 다른 형태를 써볼까 생각 중이에요. 1시간 단위로 팍팍하게 하루 일정을 기록할 수 있는 다이어리였는데, 가지고 다니지도 않을 뿐더러, 매일매일이 크게 다를바 없는 주기로 이뤄져 채우기 민망하더군요. 일화 중심의 일기다운 다이어리를 써보고 싶네요. 그래도 아직 두 달이나 남았으니까.


캐이블 TV는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편성표와도 달리 프로를 방영할 때가 많더군요. 10분 빨리 혹은 10분 늦게 방송을 합니다. 전에 보니 공중파 명작극장 같은 경우도 15분을 늦게 트는 경우도 있었으니, 요새는 다 그런 식인가 봅니다. 그리고 말이 1시간이지 중간에 20분 가까이 광고를 하는데 그럴 때는 집안일을 합니다. 어쩌다 FW 패션쇼를 방송해주면 크로키를 해 봅니다. 그러고나면 몸과 정신이 완전히 노곤해집니다. 50분 들여 글을 써보는데 처음에는 마음이 급했으나 이제와서는 의외로 시간이 꽤 남는군요.


생각해보면 삶은 일화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사귀어도 시간이 흐르다보면 하나로 합쳐버린 레이어처럼 매 년 있었던 일들은 잘 떠오르지 않고, 몇몇 사건들과 대화들, 이야기들이 떠오릅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봤는데, 제목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매혹적입니다. (서점에서 뽑아 목차와 내용을 잠시 살펴봤지만 다시 꽂아놓았네요.) 우리가 가장 익숙해서 자각하지도 못하는 일상들이 나중에 재현하기 제일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기 때문에요.


지난 주 금요일이었습니다. 퇴근하려고 내려왔는데 자전거에 수북히 마른 솔잎들이 쌓여있었습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런 적은 없었지요. 아무래도 조용히 떨어져 내리는 솔잎들이 상당한 바람을 만나는 얼마 안 되는 날이었나 봅니다. 그것들을 걷어내고 이미 진 해가 남긴 보랏 빛을 뒤로 집에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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