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테리 하우스

2023.08.21 14:47

돌도끼 조회 수:209

IBM 직원 출신인 켄 윌리엄스는 아내 로버타와 함께 온라인 시스템즈라는 컴퓨터 컨설팅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70년대 말 둘은 애플II 컴퓨터를 구입했고 켄의 소개로 로버타는 어드벤처 게임이란 걸 알게됩니다. 장르에 완전히 빠진 로버타는 온갖 어드벤처 게임들을 섭렵합니다. 어려서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던 로버타는 이런 저런 게임들을 해보다 자기도 한번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로버타는 글자만 보면서 진행해야하는 어드벤처 게임에 갑갑함을 느껴서 그림을 넣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드벤처 게임은 개인용 컴퓨터라는 게 보급되기 전부터 알파넷 등에서 이미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컴퓨터가 자기 할일에 맞춰서 필요한 기능만 갖고있는 경우가 많아 그래픽 기능도 필수가 아닌 옵션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드벤처 게임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픽 없이 글자만으로 진행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는 성능은 낮을지라도 만능용도로 사용되었으니 그래픽 표시는 거의 기본이었고 애플II에도 그럭저럭 쓸만한 그래픽 기능이 있습니다. 이왕 있는 기능 쓰면 좋잖아요. 그래서 그림이 들어간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겠죠. 어찌보면 참 별거 아닌 생각이죠. 뭐 컬럼버스의 달걀같은 건 가봐요. 누구나 할 수 있을법한 별것 아닌 생각이더라도 그때까지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해본 거죠.

로버타는 대저택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는다는 기본틀에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류의 미스테리 플롯을 섞어 게임 시나리오를 짰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서 게임을 제작합니다.
장소가 바뀌고 상황이 변할 때마다 그림을 한장씩 새로 뿌려줘야하는데 애플 등 그때의 컴퓨터 성능으로는 대량의 그래픽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켄은 매번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써서 수십장 분량의 그림을 디스크 한장에 쑤셔넣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나온 게임 '미스테리 하우스'는 1980년부터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우편으로 주문받고, 디스크와 매뉴얼 등 부속물을 로버타가 직접 '지퍼락으로 포장해서' 발송했다고 합니다. 예상 이상으로 대박이 나자 부부는 계속해서 게임을 제작하게 되면서 컨설팅 업무는 접고, 온라인 시스템즈는 게임 전문회사가 됩니다. 이후 시에라 네바다 산맥 근처로 회사를 옮기면서 사명을 '시에라 온라인'으로 고쳤고, 그후로 계속 '시에라'가 회사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미스테리 하우스'는 물론 어드벤처 게임으로서 완성도 및 재미가 있어서 히트한 거겠지만, 그림이 들어갔다는 것 말고는 다른 혁신적인 면은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거기다 무명의 생판 초짜들이 만든 게임이었는데도 대박이 났다는 건 그만큼 그 '그림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겐 신선하게 여겨졌던 거겠죠. 컴퓨터가 직접 그려야하니 그림은 단순할 수 밖에 없고, 거기다 윌리엄스 부부의 미술센스가 꽝..썩 좋지는 않아서 '미스테리 하우스'에 들어간 그림은 꼭 초딩이 한 낙서같은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먹혔다는 거죠.

'미스테리 하우스' 이후로 어드벤처는 그래픽 어드벤처와 텍스트 어드벤처로 갈라졌고,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은 점점 세력이 줄어들고 그래픽 어드벤처는 큰 인기를 얻으며 그 뒤로도 계속 진화해갑니다. 로버타 윌리엄스는 '킹스 퀘스트'와 그 후속작들을 만들어 진화를 주도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그래픽 어드벤처는 '킹스 퀘스트'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KQ'도 '미스테리 하우스'에서 갈라져나온 것이고, 역사적인 파급력면으로는 '미스테리 하우스'가 더욱 영향력있는 게임이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어찌보면 별것 아닐지도 모르는 아이디어의 파장은 아주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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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일본에 어드벤처 장르가 상륙했습니다.
일본은 텍스트 어드벤처 시대를 건너뛰고 바로 그래픽 어드벤처부터 시작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먼저 나온 텍스트 어드벤처가 하나 있긴 하지만 사람들한테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은 채로 곧바로 그래픽 어드벤처가 나와 이쪽은 대히트했기 땜에, 사람들이 그래픽 어드벤처부터 먼저 접했습니다.

그 일본 최초의 그래픽 어드벤처가 마이크로 캐빈에서 나온 '미스테리 하우스'.
게임 내용은 대저택 안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는다는 것...
엉? 시에라 게임이랑 같은 거 같은데 혹시 일본 이식판...? 그랬으면... '일본 최초'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겠죠.
게임의 타이틀 화면까지도 시에라 버전과 비슷합니다만... 별개의 게임입니다. 뭐... 간단히 말하면 짝퉁이죠.

시에라 버전은 보물찾기에 살인사건 미스테리가 섞여있었던 데 비해 일본판은 저택 안에서 혼자 돌아다니다 물건하나 찾으면 끝나는 단순 보물찾기(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빈집털이) 게임이었습니다. 이쪽이 어드벤처의 원형에 더 가까운 모습이긴 합니다. 스토리가 도입되기 전의 어드벤처는 동굴 미로 안을 돌아다니다 보물을 찾는 게임이었거든요.
이미 스토리텔링 방면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던 미국에서 보자면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의 게임이었지만, 이게 일본 게이머들한테는 처음 해보는 어드벤처였으니까말이죠. 뛰고 쏘고 하는 게임만 해보다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희한한 유형의 게임을 처음 경험하게된 겁니다. 이 신선함이 화제가 되어 히트했고, 곧이어 여러 회사들이 '미스테리 하우스'를 모방한 빈집..보물찾기 게임을 우수수 만들어내면서 일본에도 어드벤처 장르가 유행하게 됩니다. 마이크로 캐빈은 이후로도 어드벤처의 원조이자 명가로 이름을 날리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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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는 일본에서 짝퉁이 나왔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로서는 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83년에 외국게임을 컨버전하는 걸 전문으로하는 업체가 시에라판 '미스테리 하우스'를 일본에 출시했지만, 이미 일본에선 마이크로 캐빈 게 대히트해 제목을 선점해 버린 뒤(그것도 일본 어드벤처의 원조라는 타이틀과 함께...)였고, 늦게 나온 시에라 버전은 걍 묻혔습니다.
그래서, '미스테리 하우스'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과 그외 다른 나라 사람들은 똑같이 그래픽 어드벤처의 원조라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게임을 머리속에 떠올립니다.

그후로도 내내 시에라 게임들은 일본 사람들의 관심을 그닥 끌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나중에 '글자를 읽는 게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진행되는 게임' 형태로 어드벤처의 판을 완전히 뒤엎어버리게되는 '킹스 퀘스트'가 일본에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결과 'KQ' 이후 진행된 어드벤처 장르의 진화가 일본에는 반영이 되지 않아서... 그후로도 오랫동안 일본 어드벤처는 '읽는 게임'이라는 형태에 머물게되었고 나름의 독자적인 진화를 거쳐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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