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없다고 해도 될 듯 하네요.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 또 볼 게 뭐 있나... 하고 뒤지다가 일본 애니메이션 '도로로'의 2019년 버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첫 화를 잠깐 보다가... 집에 사놓고 장기 숙성 시킨 원작 만화책이 있다는 게 생각나서 원작부터 다 읽고 애니메이션도 다 봤어요. 원작과 비교하며 보니 재미가 좀 더 늘어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


 - 공통저인 기본 설정은 이렇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 직전의 일본. 자기 영지가 늘 가뭄과 역병에 시달려 별 볼 일 없던 영주 한 놈이 동네 사당으로 가서 마신(=요괴)와 딜을 합니다. 곧 태어날 내 자식을 바칠 테니 이 땅을 번영하게 해달라. 그런데 참말로 소박한 이 요괴들(원작은 사십 몇 마리고 애니판은 열두마리)은 태어날 아기의 신체 일부를 사이 좋게 나눠 갖는 걸로 만족해주네요. 그리고 영주는 남은 찌꺼기 아가를 내다 버리는데 그걸 하필 의수 의족 장인(...) 아저씨가 주워서 거의 로봇 같은 상태로 만들고 훈련시켜 싸움도 짱 잘 하는 청소년으로 무사히 키워냅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자신의 몸을 가져간 요괴를 물리치면 빼앗긴 신체 일부를 돌려 받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그 소년은 요괴 퇴치 여행길을 떠나고, 도중에 도로로라는 이름의 어린이를 만나 함께 다니게 되는데... (그렇습니다. 주인공은 도로로가 아닙니다. 주인공 이름은 햐키마루.)


 - 먼저 원작 얘기부터 하죠. 
 데츠카 오사무.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무시무시한 작가가... 만들다 만 작품입니다. 말 그대로 만들다 말았어요. 인기가 없어서 한 번 연재 중단된 걸 잡지 옮겨서 다시 시도하다가 또 잘 안 돼서 갑작스럽게 한 회 분량 동안 개그만화급의 급전개로 끝내 버렸거든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 '도로로'는 꽤 훌륭한 건더기가 많은 작품입니다. 
 일단 작가 특유의 반전 사상이 되게 잘 표현되어 있어요. 전쟁에 정의가 어딨고 영웅따위가 어딨어 다 그냥 허세들린 사무라이들이랑 도적떼들 민폐짓에 백성들만 죽어난 거지... 라는 본인 신념을 리얼하게 처참한 백성들 삶 묘사와 잔혹한 전쟁 장면들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거든요. 이게 옛날 데츠카 오사무 그림체라 다행이지 리얼한 극화풍 그림이었으면 보다 견디기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툭하면 사람이 칼로 토막 나고 활로 고슴도치 되며 죽는 장면들이 튀어 나오는데 어린이도 예외가 되질 못 해서(...)

 그 와중에 이 만화 내용의 근간인 요괴들 이야기도 꽤 으스스하게 괜찮구요. 디자인들도 음침하니 괜찮고 각각 설정들도 실제로 있는 괴담들을 참고했나 싶게 칙칙하게 재밌어요. 

 그리고 뭣보다 캐릭터들이 매력적입니다. 워낙 오래된 만화라 지금 볼 때 촌스러운 느낌이 다 조금씩 있긴 하지만 살짝만 손 보면 요즘 시대에도 먹힐만한 아이디어가 많죠. 온 몸이 다 나무로 만들어져서 늘 무표정하고 기괴한 꼴을 하고 있는 히어로라든가. 이 놈이 자신의 가짜 몸엔 감각이 없다는 걸 활용하는 전투씬들도 나름 재밌구요. 함께 다니는 어린이 '도로로'의 캐릭터는 나름 시대를 앞서가는 느낌도 있으면서 주인공과의 합도 잘 맞습니다. 

 그래서 보고 나면 이게 요즘 시절에 나왔다면... 이라든가, 이게 제대로 끝맺음이 되었다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튀어 나온 것이 바로 2019년판 애니메이션입니다. 


 - 애니메이션판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만 있구요. 에피소드당 24분(오프닝 엔딩 빼면 20분이 될까말까)에 총 24화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긴 분량은 아니지만 원작이 만화책 네 권 짜리이니. ㅋㅋㅋ

 원작의 포스 때문인지 애니메이션판의 내용는 원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아, 물론 21세기 일본 애니메이션 수요자들에게 맞춰 캐릭터도 디자인이나 성격을 살짝 손 보긴 하지만 '지나친 모에화'라든가 '원작 파괴' 같은 부정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구요. 오히려 원작보다 이 버전이 더 그럴싸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고쳐지거나 추가된 요소들은 대부분 원작의 구멍들을 메우고 설정들을 좀 더 디테일하게 만드는 데 쓰이며 그게 꽤 적절합니다. 추가된 엔딩도 호불호는 갈릴 수 있으나 오리지널보단 훨씬 낫고 이치에도 맞고 주제에도 맞아요. 

 예를 들면, 주인공의 몸을 가져간 마신의 숫자가 사십 몇 마리에서 열 두 마리로 확 줄었는데, 현실적으로 제작 가능한 에피소드 숫자에 맞는 숫자이기도 하고 또... 그 갓난 아기 몸을 어떻게 나눠야 사십 몇 군데가 되겠어요. 이 쪽이 훨씬 이치에 맞고 작품 완성도에도 도움이 되죠. 실제로 원작은 열 몇 군데 되찾다가 끝나거든요. ㅋㅋㅋ
 그리고 원작은 원활한 이야기 진행을 위해 입도 성대도 없는 햐키마루에게 텔레파시 능력을 부여해 놨었는데 애니판에선 그 설정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격도 원작의 지나칠정도로 멀쩡하고 활발한 (심지어 텔레파시 수다쟁이;) 청년을 입이 생겨도 말도 잘 못 하는 어린 아기 같은 성격으로 바꿔놨죠. 여러모로 후자가 현실적이면서 드라마도 더 풍부해지고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원작의 설정과 장면들을 최대한 살리면서 열심히 개연성을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고... 뭐 그러는 와중에 가장 크고도 중요하며 훌륭한 변화는, 애니메이션판은 햐키마루가 자신의 신체를 되찾는 여정에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해 놓았다는 겁니다. 원작에서 햐키마루는 걍 열심히 자기 몸 찾으면 되는 거고... 그냥 그것 뿐이었거든요. 근데 애니메이션판에선 햐키마루가 자기 몸을 찾기 위해 마신 하나를 죽일 때마다 햐키마루 아버지가 마신들과 맺은 계약이 조금씩 파괴됩니다. 결국 햐키마루가 온전한 몸을 갖게 되면 그 영토 주민들은 다시 지독한 가뭄과 역병,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에 시달리게 된다는 거죠. 이치에 맞으면서도 원작보다 더 깊이 있는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탁월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니 몸 하나 되찾자고 이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 넣어야해? 지금도 꽤 많이 찾아 놨는데 그냥 이쯤에서 그만 두면 안 될까?" 주인공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변명해내긴 어려운 질문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단점도 있긴 해요. 매끈하게 이야기를 다듬어 놓는 과정에서 좀 전형적인 요즘 일본 소년 만화 같은 모양새가 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작에도 나왔던 이야기가 다 끝나고 지금 작가들이 아예 창작해낸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전개가 많이 거칠고 급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나름 꽤 적절한 엔딩도 여운이 잘 살지 않구요. 
 하지만 이 정도면 전설의 레전드급 대우 받던 작가의 유명 작품을 개작한 사례들 중에서 되게 출중하게 잘 해낸 편에 속하지 않나 싶었고. 그래서 그럭저럭 만족했습니다. 기대보단 훨씬 나았어요.


 - 만약에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중에 하나만 추천하라면 뭘 하겠냐... 는 걸 생각해보면.
 그냥 책 좋아하는 분들, 고전 좋아하는 분들은 만화책 보시고 그게 아니라면 애니메이션 보시고 그럼 되겠습니다.
 원작은 짦아서 금방 보고 치우기도 좋고, 또 여러모로 모자란 구석은 눈에 띄어도 어쨌거나 '거장'의 흔적 같은 건 충분히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요즘 기준으로 보면 좀 재미가 없어서 4권이 8권쯤으로 느껴질 위험이 있구요. ㅋㅋ
 애니메이션판은 위에서 말 했듯이, 원작이 이러저러한 거다!! 라는 걸 모르고 보면 그냥 좀 볼만한 일본 애니 수준입니다만. 이야기는 훨씬 매끈하고 작화나 연출의 퀄리티도 상당히 높습니다. 일본 쌈박질 애니 좋아하시고 좀 다크한 이야기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꽤 재밌을 수도 있어요.

 소감은 여기까지 하구요. 나머지는 늘 하던대로 잡담이나 몇 가지 더 늘어놓다 끝내겠습니다.
 


 - 오프닝 노래가 제 귀엔 꽤 구린 느낌이었데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는 오프닝 스킵 기능이 없습니다(...) 왜 없니. 얼른 만들어 이것들아. ㅠㅜ

 - 주인공이 자신의 몸을 주저 없이 파괴하고 내던져가며 적을 무찌르는 장면들에서 '무한의 주인'이 생각나더군요. 그냥 우연은 아닐 듯.

 - 훌륭한 영주라고 다들 알고 있지만 알고 보면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군주와 인정 욕구에 불타오르는 그 아들래미. 혈혈단신으로 그들에 맞서는 과묵한 전투 요원과 그에게 싸움을 위한 의수를 제작해주는 슬픈 과거를 숨긴 남자. 이렇게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최근 게임 '세키로'의 인간 관계와 대충 들어 맞습니다. 디테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캐릭터들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충 보면 많이 비슷해서 혹시 이것도... 데즈카 오사무 만물 창조설

 - 이걸 보고 나니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게게게의 키타로'를 만화책으로 보고 싶어졌는데. 정발판이 오래 전에 절판되고 재판되지도 않아서 볼 길이 없군요. 아쉬운대로 집에 있는 이토 준지 컬렉션이나 봐야겠습니다. 전혀 안 비슷하지만;;

 - 작화가 상당히 좋습니다. 꽤 훌륭한데... 하필 직전에 본 애니가 '바이올렛 에버가든'이어서 보면서 계속 흠을 발견하게 되더군요. 정말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작화는 괴물급이었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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