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람의 노래

2019.10.19 07:32

어디로갈까 조회 수:1097

일주일에 한번, 과일/채소 껍질따위의 '생쓰레기' 모으는 날이라 새벽에 아파트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래가 마음을 홀렸는데, 살펴보니 생수배달 용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어요.
누가 부르든지 제겐 그여자의 음성으로 변환되어 들리는, 서럽고 나른하고 맑은 전설 같은 노래 <봄날은 간다>.

이 노래에 매혹된 건 몇 년 전 늦봄의 일이었습니다.  설악산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일행 셋과 속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어요. 어시장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저녁을 빙자한 술을 마시다가, 자리가 지루해서 혼자 밖으로 나선 길이었죠.
비릿함이 배인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은 어둠 속에서 간신히 생기를 띠우고 있는 옹색한 술집 불빛들. 느릿느릿 그 불빛들을 따라 걸었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한 술집 앞을 지나다가 그여자의 노래소리를 들었어요.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솜씨였습니다.  삶의 신산을 다 맛본 소리꾼들이 낼 수 있는소리. 가슴 속 한이 목이 아니라 척추를 통과해서 나오는 듯한 소리. 비애와 허무와 흥과 권태가 뒤엉켜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여러 개의 매듭을 짓는 소리.
여자는 잠간씩 쉬어가며 연이어 노래를 불러대었고, 저는 더 이상 나아갈 곳 없는 땅끝에 선 듯 그 자리에 멈춰서 무연히 여자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기어이 일행들을 끌고와서 그 술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주인 할머니 외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여기 명창이 있다는 소문 듣고 서울에서 왔는데요?"
밑반찬을 내어놓는 주인을 향해 한 동료가 너스레를 떨었죠. 그 소리를 들었는지 주방 옆에 딸린 내실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한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목소리로 짐작했던 것과 달리 앳되고 맑은 얼굴이었어요. 책 몇 권 들려서 대학 교정에 세워놓으면 어울릴 것 같은 청순함이 있었고, 함부로 감정을 허물지 않을 단정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날밤. 술은 상징처럼 따라만 놓고 저는 여자의 노래에 취했습니다. 5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애절한 트로트들이 총망라되었는데, 각 노래마다 후렴인 양 <봄날은 간다>를 반복해서 청해 들었어요. 노래를 마칠 때나 술잔을 홀짝 비울 때, 여자는 옆눈으로 흘깃 저를 바라보고는 했습니다. 짧게 스치던 그 눈길에서 받았던 차분하면서도 꼼꼼한 긴 응시의 느낌. 그리고 수없이 고통스럽게 너그러워져본 사람들이 갖는 따뜻한 무관심의 접대 방식. 아마도 그날 저는 겪어보지 않은 삶의 한 경계를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씨(여자의 이름)에게 정표로 꼭 무얼 하나 주고 싶어요. 근데 내겐 잘라서 줄 옷고름도 없고, 흔한 실반지 하나 없고, 반쪽을 낼만한 청동 거울도 없어요. 내가 돈을 좀 나누어주면 불쾌할까요?"
헤어질 시간이 되어 제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제 눈을 빤히 쳐다봤습니다. 아릿아릿한 슬픔과 당돌한 장난기가 담겨 있던 그 눈빛!
"정표로야 돈만한 게 있나요?"
그러고는 제가 무안해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제 손을 꽉 잡았어요. 용모와 어울리지 않게 두텁고 거친 손이었습니다.  노동을 많이 한 손이었죠.
"내게 반했군요? 많이만 주세요. 언니는 견자군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은 때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러브레터'의 히로코처럼 소리쳐볼까요.  오겡끼데스까? ....... 아따시와 겡끼데스.
잘 지내지 못하더라도 살아만 있어요. 살아 있는 동안만 우리가 같은 세상이니. 

덧: 그녀를 만난 날의 일기를 들쳐보니 '잠깰 오寤' 한 자만 적혀 있네요. 1.잠을 깨다 2.각성하다 3.만나다 4.꿈 5.거꾸로 라는 의미를 담은 한자. 밝히자면, 노래 솜씨만큼이나 그녀가 견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심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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