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질 결심

2023.08.22 16:09

Sonny 조회 수:576

이 전에 제가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에 권태를 느꼈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친구를 다른 친구 포함해서 만났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거의 10년만에 만나는지라 동창회하는 기분으로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조금 묘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오래된 친구를 A라고 하고, 10년만에 만난 친구를 B라고 하면 B와의 대화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A와의 대화는 조금 껄끄럽고 제가 마음에 힘을 줘서 리액션을 해야하더군요. 그 때부터 제가 A에 대한 우정 비스무레한 감정이 꽤나 많이 식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안맞는다는 걸 계속 실감하게 된달까요.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한게, A도 저에 대한 불만같은 게 쌓였었나봅니다. 밥을 먹고 까페로 이동해서는 저를 향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털어놓더군요. 평상시에 저한테 그런 말을 거의 안하는 친구인데 꽤나 직설적으로 말해서 놀랐습니다. 자기계발서 읽은 거 가지고 뭐라고 해서 무슨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다, 진짜 안맞는다, 이런 말을 했는데 제가 말한 맥락들이 조금 편집되어서 저도 항의를 했습니다. 취미가 뭐냐고 물어봤을 때 독서가 취미다, 라고 한 다음에 자기계발서를 읽는다고 하면 거기에 순순히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저는 이 친구가 여가시간에 뭘 하면서 노는지 전혀 모릅니다. 아는 시간이 꽤 오래되었는데도요. 그래서 취미가 뭐냐고 물어봤던 것이고 독서를 말한 다음 자기계발서를 말하길래 조금 타박하긴 했습니다. 자기계발서 말고 다른 책을 차라리 읽으라고요. 원론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취향에 뭐하러 꼰대질을 하냐고 하실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조차도 제가 이 친구에게 가진 답답함이 쌓였다가 좀 터져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과 다른 부분, 자기와 안맞는 부분은 그냥 패스하고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만 인간관계가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지요. 저 자신의 기준이라거나 세간의 일반적인 기준 같은 것이 있고 그 친구와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제가 그 무엇도 평가하지 않은 채 '다름'으로 흘려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문화적 감흥을 제 취미생활에서 크게 할애하고 있고 그 부분을 교류할 수 있는지를 인간관계의 제일 큰 재미로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부분에서 저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습니다. 극장에는 당연히 안가고 읽은 책을 물어보면 자기계발서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것도 요즘 유행한다거나 제가 재미있어하는 걸 안봅니다. 그러니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운동도 안하고 다른 뭘 하는 것도 없습니다. 


아마 다정한 분들은 제가 좋아하는 걸 그 친구와 같이 즐겨보라고 하시겠지만... 이미 다 해봤습니다. 이 친구가 굳이 극장에 안다니는 걸 알기에 저는 이 친구가 그래도 좋아할만한, 안지루해할만한 영화를 골라서 같이 보러가고 그랬죠.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슬램덩크]였습니다. 팔구십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흥미를 느낄만한 영화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보고나서 그 친구는 딱 한마디 했습니다. 재미있네. 이 일화를 듣던 다른 친구도 놀라더라구요. 그거 엄청 재미있던데? 그러니까 제가 느끼는 감흥을 같이 느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맛집도 찾고, 영화도 찾고, 어딜 가보자고도 하고.... 그러나 모든 반응이 다 무감흥으로 끝납니다. 물론 재미있다거나 맛있다고는 하죠. 그런데 한두마디로 끝나니 저도 이런 일방적인 노력을 하는 게 허무해집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오래된 연인 사이의 다툼같기도 하네요 ㅎ


그렇다면 그 동안 뭘 했느냐. 돌이켜보니 만나면 이 친구는 늘 자신의 괴로운 이야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남들보다 조금 운이 없긴 합니다. 들어간 기업이 하필 블랙기업인 경우도 있었고, 사회생활도 아주 유도리 있게 하는 편이 아니라 손해를 더 보기도 하죠. 가족들의 사정도 썩 좋지가 않구요. 그러니 만나면 이 친구의 고된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상사가 날 갈궜다, 회사가 이러는 게 말이 되느냐, 동료가 나에게 싸가지없는 것 같다, 가족 중 누가 속을 썩인다.... 이러니 제가 할 이야기도 정해져있습니다. 그 친구를 걱정하거나 위로하거나. 그 친구의 쥐구멍에 확신없이 볕들날을 멋대로 끌어와서 던져줍니다. 이런 대화가 반복된 게 거의 오륙년은 된 것 같은데, 그 동안 제가 이 친구에게 받은 게 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를 받고, 저는 고마운 사람이 되죠. 그런데 둘의 시간이 즐겁거나 기뻤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의 만남이 기대가 되지 않는 그런 관계였던 거죠.


이 친구에게 제가 느끼는 감정은 오래된 고시생 연인을 보는 직장인의 그것입니다. 왜 그런 글이 생각납니다. 자기도 이제 주말에는 조금 더 비싸고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내면서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애인 형편에 맞춰서 계속 '콩불'만 가는 건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이렇게 쓰면 그 친구는 가난하고 저는 어느 정도 형편이 나은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친구를 만나면 어떤 특별한 순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랑 만날 때마다 늘 맛집도 내가 찾고, 뭘 먹을지 물어보면 너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좀 질타를 했더니 그건 미안하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뒤에 한 이야기가 충격이었습니다. 자긴 원래 남자들 만날 때는 아무데나 간다고, 그냥 김밥천국 간다고요. (그렇다고 이성을 만나기는 하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친구는 인간관계가 정말 협소해요) 30살이 넘었는데 두세달에 한번씩 보는 친구랑 김밥천국을 간다는 게 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고오급 레스토랑에 가자는 게 아니라, 누굴 만나든 정말 바쁠 때 한끼 때우는 그런 식당보다는 조금 더 구색을 갖춘 곳을 가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요. 저는 이 친구에게 악의없이 홀대를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부박한 삶으로 저를 끌고 들어갑니다. 제가 혼자 밥먹을 때 신물나게 경험하는 그 '별볼일없음'의 세계를 망설임없이 공유하려는 그에게서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죠. 아무리 편한 사이이고 오래된 친구여도 저는 이왕에 만나는 거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식당에 같이 가고 싶습니다. 아무데나 가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이 친구랑 만나면 안좋은 이야기를 하고 위로까지 나눌 수는 있는데 평소보다 더 즐겁거나 기쁜 순간을 추구하지는 못합니다. 저희 둘이 만나서 뭔가 재미있는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각자 인생에서 작게나마 재미나고 특별했던 순간을 나누지도 못합니다. 저는 그 친구의 "그냥"으로 끌려들어갑니다. 제가 신경을 안쓰면 그냥 아무데나 가서, 아무거나 먹고 끝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친구와의 만남이 감정적으로 '가난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즐거움도 갱신되지 않고 오로지 고된 삶에 대한 토로만이 이어집니다. 딱히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지만,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는 이런 감각이 처음이라서 참 당혹스럽습니다. 지겹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 어떤 호기심이나 기대감도 생기지가 않아요.


아마 이 친구와는 이렇게 관계가 정립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한두번 안부는 묻고 식사를 할 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같이 시간을 보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무섭습니다. 딱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그저 그런 시간이 쌓이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실패해버리니까요.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자극과 감흥을 주지 않으면 관계는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저는 제 주변사람들 누구에게라도 이런 감각을 주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질리는 느낌, 지독한 실망감이 이번 한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06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464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3564
124201 밴드 오브 브라더스 책 catgotmy 2023.09.06 119
124200 [넷플릭스바낭] 샤말란은 언제나 샤말란, '똑똑똑' 잡담입니다 [12] 로이배티 2023.09.06 696
124199 가을인지 알았는데, 다시 여름..(9월 더위) [2] 왜냐하면 2023.09.06 225
124198 프레임드 #544 [4] Lunagazer 2023.09.06 76
124197 이런저런 사운드카드들 잡담 [2] 돌도끼 2023.09.06 179
124196 스트릿개그우먼파이터2 [2] 왜냐하면 2023.09.06 350
124195 국민의 힘 싫어하지만 정권교체하려고 대통령 된 윤석열 녹취록 [2] 상수 2023.09.06 799
124194 아드만 스튜디오X넷플릭스 신작 치킨 런: 너겟의 탄생 공식 티저 예고편 상수 2023.09.06 177
124193 오늘 아침에 맨유 안토니 여친 폭행설 생각했었는데 daviddain 2023.09.05 136
124192 [영화바낭] 30년 묵은 구닥다리 스티븐 킹 영화, '욕망을 파는 집'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3.09.05 313
124191 제 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리스트 상수 2023.09.05 190
124190 프레임드 #543 [4] Lunagazer 2023.09.05 84
124189 크리스마스 캐롤과 오만과 편견 [2] catgotmy 2023.09.05 154
124188 [김규항의 교육·시장·인간](1)부모 자본가의 출현, (2)반공 노인과 반페미 소년 [1] ND 2023.09.05 314
124187 알기만 하던 용각산 생전 첨 먹어봤는데 [3] 가끔영화 2023.09.05 248
124186 점심에 햄버거 먹고 떠오른 잡상 ㅡ 축구 얘기 싫으신 분은 패스 [1] daviddain 2023.09.05 154
12418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3] 조성용 2023.09.05 504
124184 혹시 일본 음악 중 가사가 참 특이하고 좋다. 그런 음악 있으세요? [5] 한동안익명 2023.09.05 332
124183 [넷플릭스바낭] 순수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려 보아요. '바이올런트 나잇' 잡담입니다 [14] 로이배티 2023.09.04 510
124182 맥도날드 새 광고 - 주문하시겠어요? (60초 버전) [3] 상수 2023.09.04 3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