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나)를 위한 변명

2021.05.3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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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종일 바둑을 뒀는데, 제가 바둑에서 가장 재미있게 느끼는 부분은 판을 끝낸 후 복기할 때입니다.  인공지능으로 처리하면 별 것 아니고 현대에서는 영상 녹화만 해 두어도 되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복기 능력은 기억력만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인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상황에서 가능했을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는 것은 개인이 성장해가는데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의 반성 능력은 자기 판단/ 행위를 돌이켜 보면서 그게 달랐을 가능성을 떠올려 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이죠. 현재는 컴퓨터가 실재로 존재하는 자료를 다 옮겨오지만, 그 개별 상황에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은 개인의 능력인 것이죠.

#아버지 책상에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이 놓여 있더군요. (아마 재독 삼독 하는 중이실 듯.)
이 책은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라는 아들의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중이 역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던진 질문이죠. 요즘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도 많지 않을 뿐더러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각자의 성정을 잠시 누르고 생각에 잠기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인간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거창하고 장황한 질문이어서 던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블로크는 자신의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지는 않았으나 문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역사는 시간 속의 인간들에 관한 학문입니다.
역사는 죽은 사람에 관한 연구와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연구를 결합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죠. 역사는 왕조나 시대 같은 공식적인 역사 아래 가로놓인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개인의 삶은 너무 짧고 지식은 너무나 광대하여 총체적인 체험을 획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역사는 보편사를 꿈꾸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르크 블로크는 20세기 역사학에 구체성의 힘을 부여한 아날학파의 제1세대 역사학자입니다.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했을 만큼 실천적이었고, 그의 사학 역시 삶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는 실천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게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연결입니다.  "현재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과거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이런 언술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살아있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중요한 자질이다."

역사가는 역사를 쓰면서 현실에 참여하고 있고, 죽은 사람의 연구를 통해 산 사람의 삶을 사유하고 개입합니다. 역사가는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심미적 즐거움까지 줍니다. 역사는 삶의 시간을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며, 독려해줘요. 
<역사를 위한 변명>은 역사가 자신이 얼마나 진실되게 살아왔는가를 고백하는 책입니다.  그의 아들이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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