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표현의 불편함

2015.05.11 15:14

zoro 조회 수:1191

아주 어릴 적 삼촌이 영화관엘 데리고 갔어요. 

람보라는 영화였는데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저는 그 폭력과 빨간색의 이미지에 엄청나게 충격을 먹었습니다. 구토를 했는가 구토할 것 같다고 하소연했나, 결국 저는 상영관 바깥 빈 벤치에 홀로 앉아 삼촌을 기다리고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의 그 끔찍한 기억과 일그러져 추상화된 이미지는 아직도 제 머릿 속엔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온당한 설명없이 죽어 넘어가는 수 많은 사람들에 혼란스러웠던 것도 같구요. 

아직도 남들 다 즐기는 액션영화 등을 볼 때면 이상하게 주인공에게 당하는 엑스트라에 감정이입 될 때가 많아요.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게 손짓 하나로 한 생명을 그야말로 온전히 끊어버리고는 길가 깡통을 차버린 듯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고는 제 갈길을 가죠. 어머니 아버지는 행복 속에 한 아이를 낳았고 처음의 걸음마, 이가 하나씩 나고 서투르게 연애를 시작했겠죠. 그런데 죽어버렸습니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정의로운 척 하는 주인공 나부랭이한테.

나쁜 짓을 했으니 뒈져도 싸다는 사람 머릿 속의 정당화는 참 쉽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섣불리 편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들의 영화가 세상에는 많더군요. 지극히 사실적인 폭력묘사와 정말 역겨운 감정을 유발하는 성적 묘사는 영화제같은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섣불리 그 표현의 의도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고 그저 자극적인 이미지 자체가 목적이라 결론 내릴 때도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선택한 프로그래머는 그런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 영활 선보였으며 지금 함께 있는 옆의 관객들은 나처럼 참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걸 만든 작자의 변이란걸 들을 때면 항상 그들은 매우 진지하거나 확신에 찬 열정이 있거나 적어도 그 시선만큼은 올곧게 명확하고 빛이 났었습니다. 보면 볼수록 나의 고상함은 싸구려였고, 뻔한 생각이나 머리에 박혀 있는 시정잡배에 불과하더군요. 결론은 당신이 표현하는 그 자체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내 판단이란건 한없이 허술하고 그래서 나약합니다. 

어쨋든 불편한 감정조차 저 예술이 주는 하나의 감정이라 여기게 되는 데에 조금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도 같습니다. 


내가 속한 단위의 세상이라는건 내가 허용하는 범위와 더해 내가 관용을 두고 노력을 하여 지켜보려하는 시야까지일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술이 세상을 비추고 그 속의 개개인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어찌 더 보려 더 가보려 하지 않겠습니까. 

표현은 그야말고 금기가 없고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로와서 그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얼마나 좁고 편협한가. 내가 고작 허용할 수 있는 거라는게 세상의 손톱만큼이라도 될까. 그렇게 불편함을 극복해나가며 이해하고 성장해 갑니다. 이런 예술없이 나같은 인간이 과연 예를 들면 동성끼리의 성 따위를 머리말고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생각도 듭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