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 시인의 시에 대해서

2015.05.07 20:26

김실밥 조회 수:4001

   <솔로강아지> 시집에 깊게 관심을 안 두다가, 사태가 커지면서 시를 찾아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들이 사장되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시인에 대한 왜곡된 말들, 인신공격이 쏟아지는 것이 안타까워, 못 쓰는 글로 평을 좀 남겨둡니다. 잘 쓰는 분들이 시에 대한 본격적인 평을 남기기 시작하면 이 글은 잊어주세요..



1.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적절한 타이밍에 시집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절판된 형편이 아쉽습니다. 논란이 된 시편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읽어봤다면 진작 사뒀을 시집입니다. 원문을 구할 수 없어서 검색으로만 몇 편 읽어볼 수 있었는데, 매우 잘 훈련된 시들이고, 시인으로서의 시적 자의식도 탁월하며, 열 살 아이의 작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엄마가 시인이기에 엄마의 손을 탔을 것이다-라는 외부적 의혹과 결부시켜서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런 의혹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근거 없이 제시된 것들이고, 시만 놓고 보면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듯합니다(부모의 손을 타는 말들에 대한 적개심이 보입니다). 일단 독자로서 시를 접하는 윤리는 시 외부에서 유래한 의혹을 갖는 데에 있는 건 아닌 듯합니다. 시에 대한 논란은 많은데, 논란 속에서 모두 프레이밍된 용어들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에 대한 의혹이 시 자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시 외부적 루머들에서 힘을 얻는 것처럼, 시를 비판하거나 변론하려 할 때도 시 자체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 싸구려 인터넷 신문기사의 말들을 빌려옵니다. "싸이코패스 어린이"가 아니라 "이순영 시인"이라고, "잔혹동시"가 아니라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 시인의 시를 개별 시편만 두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체로 설득력도 없습니다. 매 시편을 완결된 텍스트로서 단순히 감상할 수는 있지만, 이순영 시인의 시작(詩作)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서는 그의 시세계 전체를 살펴보아야 설득력이 생깁니다.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하던 당시 그를 비판하던 독자들은, 아마도 다른 잡지에 수록된 그의 여타 작품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을 것이고,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문예지가 아니라 주로 건축잡지를 통해서 작품을 발표하던 이상의 20~30년대에, 그는 유명한 '문인'은 아니었고, 문인들 사이에서도 그냥 그런 시인이 있다, 정도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대중의 형편은 더욱 열악했을 겁니다. 당시 한용운, 김소월, 박영희, 김억 정도가 이상 이전에 존재했던 한국시인들인데, 그런 시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한시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작품만 읽다가 난데없이 오감도 제 1호 - 열 셋의 아해들이 막다른 길로 질주하는 이야기를 읽었던 독자들의 당혹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들은 당시 이상의 달리는 아해들, (근대적인) 도로와 골목들, 도시에 대한 사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서 "골목"이나 공포의 감정을 가져오는 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벌어진 것이 연재중단 사태였습니다.

  

  이순영 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학원가기 싫은 날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엄마에 대한 무차별적 증오와 살인충동, 학원에 가기 싫은 시적 화자의 투정어린 복수심 정도로 오독하기 딱입니다. 그런 오독에 근간해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이상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혐의를 씌웠고, 이순영 시인의 시가 다른 시편들을 통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와 부모의 장삿속/스타병으로 덧입혀진 채 해석되었습니다. 이순영 시인이 어디에서 "엄마"라는 "메타포"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는지, 막 10대에 진입한 어린아이로서 갖고 있는 자의식이 어떠한지는 소명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습니다. 같은 결과로, 출판사가 시집 전체를 회수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상과 이순영을 동일한 "잃어버린 천재성"의 신화 속에 가두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한국의 대중들이 전위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공격적 이질성에 대해서 느끼는 알러지 반응입니다. 이상이 공격한 것이 막 합리적 자아의 자기표현 공간으로서 싹트던 1910~20년대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념이었다면, 이순영이 공격한 것은 다양한 종류의 '아이스러움'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심은 순수해야 한다"는 표어를 경구처럼 믿고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꼭 그런 관념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아이스러움은 다양한 종류의 잔인함/폭력성/기만행위/영악함을 오갈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지만(그만큼 대중의 '아이'에 대한 관념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넘어서서는 안 될 지점이 있습니다. "학원가기 싫은 날"은 그 관념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보여지는 소재의 측면(폭력성)에서도 그렇지만, 아이가 가져야 할 글쓰기 행위에 관한 관념 역시 넘어섭니다. "아이들의 글쓰기는 위악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글쓰기는 자기 내면의 소리(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써야 한다, 아이는 분열된 글쓰기를 해서는 안 된다, 아이의 글쓰기는 분열적인 것/분열을 전략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

  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 


  상처딱지가 떨어진 자리 

  피가 맺힌다 


  붉은 색을 보니 먹고 싶다 

  살짝 혀를 댄다 


  상큼한 쇠맛 

  이래서 모기가 좋아하나? 


  나는 모기도 아닌데 

  순간 왜 피를 먹었을까 


  몸속에 숨어 사는 피의 정체를 

  알아보려면 

  상처딱지를 뜯고 피를 맛보아야 한다 


  모기처럼 열심히 피를 찾아야 한다 

  모든 시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눈 내리는 날 만난 남자 이야기 


  눈 내리는 날 만난 

  귀가 뾰족한 남자 

  말발굽을 가진 남자 


  턱에 염소수염이 달리고 

  머리카락이 말갈기인 남자 

  집엔 책밖에 없는 남자 


  이 남자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일까 


  눈 내리는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친구들과 내기를 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말하기 


  티라노사우르스 

  지네 

  귀신, 천둥, 주사 


  내가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그러자 모두들 다같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엄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순영 시인은 자신이 "시를 잘 쓴다"(「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고 말하며 그 이유를 밝힙니다. 시인은 아직 자신을 모기라고 언명할 수는 없지만, 모기에 가까워지는 기이한 행위의 순간을 포착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기이한 행위의 순간은 정상과 비정상(눈 내리는 날 만난 남자 이야기)이라는 판단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그래서 정상/비정상의 규범 밖으로 벗어나 시를 잘 쓸 수 있는 능력을 얻는 순간입니다. 정상/비정상의 규범들은 무엇을 무엇이라고, 누구를 누구라고 부르는 행위를 가능케 하지만 그런 규범은 시 속에서 폐기됩니다. 눈 내리는 날 만난 남자는 이상한 사내이고, 그 이상한 사내에 대해서 자신이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을 말할 수 없듯이, 남자 역시 화자가 누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자 앞에서 화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 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자기 자신은 규정 불가능합니다. 시집 안에 내포된 시인의 정체성은, (사실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 자기 자신을 불명료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얻어집니다. 몸 속에 있는 피는 살아있는 자아의 증빙자료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기생하는 것("숨어 사는 피의 정체")이 되고, 결국 시쓰기는 정체를 알아내야 하는 자기 내부의 피와 그것을 맛보는 혀가 교통하는 형식이 됩니다. 


  「내가 시를 잘 쓰는 이유」가 포착하는 행위는 사실 대단히 특이한 것입니다. 모기가 타인을 흡혈하는 데에 반해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자기 자신의 피를 흡혈합니다. 모기가 생살에 입을 꽂는 데에 반하여 시의 화자는 자기 상처를 뜯어내며 흡혈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낯선 것에 대한 시적 식욕, 탐색욕구가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시쓰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기 안의 다른 것, 이미 상처입은 곳을 더욱 뜯어내가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을 맛보는 행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엄마에 대한 증오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는 시편인데, 그 자체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엄마>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진술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형식으로 진술하는 글쓰기 방식입니다. 아주 손쉬운 글쓰기 방식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티라노사우르스/지네/귀신,천둥,주사"일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시인은 "말하기"라는 내기/게임의 형식을 취합니다. 이 형식 때문에 티라노사우르스, 지네, 귀신, 천둥, 주사의 실체적인 속성보다 기호로서의 속성이 강조됩니다. 단순히 "엄마"라는 실체가 공포가 아니라, "엄마라는 말"이 왜 공포스러운 것이 되었을까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이 뜯어내서 맛봐야 할 한 상처의 자리를 들춰내는 순간이라면,  「학원가기 싫은 날」은 자기 안에서 흩뿌려진 피입니다.

  



3. 

  문제가 되고 있는 「학원가기 싫은 날」은 이런 시쓰기 행위에 대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 같습니다. "엄마"를 씹어 먹고 구워 먹고 파 먹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시인의 관심은 자기 내부에 있는 낯선, 기생하는 피로서의 "엄마라는 말"이지 현실에서의 엄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메타포와 시적 언어에 대한, 10세 시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가 쓰여졌다는 것은, 제 과잉해석만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직접 연관이 없기 때문에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시들 표범무궁화불멸의 사과」에서 보여주는 글쓰기 전략은 동시라고 믿기 힘든 기술적 완성도, 말과 사물에 대한 사색을 보여줍니다. 표범은 표범이 아니라 눈물과 얼굴이 만나 굳어진 역삼각형이 되며, 무궁화는 각이 없어 행복하지 못한 오각형이 됩니다. 불멸의 사과는 나와 죽음의 고뇌를 나누는 대상이 됩니다. 


  "엄마라는 말"에 대한 증오의 정체는, 아마도 시인이 다양한 문화매체를 오가며 수집했을, 폭력적인 말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평소에 시인이 다루는 말들과는 현격한 격차를 가지고 있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가공된 것, 수집된 언어들로 제작된 것, 시인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 굴절을 거쳐서 생산해낸, 위악이라고 부를수도 있는 포즈임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 의도적으로 살아있는 엄마의 인격적 행위들은 배제됩니다. 시인 안에서 발견되는 엄마라는 말은, 화자의 식욕을 기다리는 육체로 전락합니다. 그런데 육체를 뜯어내어 맛보는 행위, 그것은 정체를 알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자기 피를 맛보고, 자신이 쓴 시에서는 자신의 피 맛이 난다고 선언한 화자의 언술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자기애입니다. 몸을 고기처럼 뜯고 싶다는 것은 일정량의 사랑, 주체가 대상을 욕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엄마라는 시어는 자기 속에서 발견되는 억압적인, 뜯어내어야 할 상처의 이미지이며, 그것을 맛보는 일은 그것에 대한 분노인 동시에 시적 관심이기도 합니다.




4.    

  시인은 싸이코패스이며 시인의 어머니는 아이를 천재성의 관념 속에 속박시키려 하고 있으며 출판사는 장삿속에 눈이 멀었다는 류의 비판들은, 사실은 시 자체를 근거로 한 것은 아니고 비판자들의 내뇌편견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눈 먼 비판자들은 시를 읽으려 하지 않은 채 시인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이는 역으로 비판자들의 비판 자격을 의심케 합니다. 이순영 시인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의 내부에 알아내어야만 하는 미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 자체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어떤 것이 자신과 달라 보이더라도 함부로 비정상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인의 안목보다 비판자들의 안목은 더욱 얕으며 편견에 의존해 있습니다. "어린이"이라는 편견에 기초한 관념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에 의하여, 한 "어린이"의 조심스러운 말이 분서당한 셈입니다.




 *시들은 구글에 걸린 외방커뮤니티의 인용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foto.canon-ci.co.kr/bbs/board.php?bo_table=garden&wr_id=174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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