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늘 음식 이야기를 더 발췌하려고 끄적거렸는데, 잘 안 써지네요. 오늘 컨디션도 굉장히 안 좋고요.

 

아까 듀게에 불어닥친 우울증 열풍에 좀 놀랐는데, 그 글 중 소수 일부 글의 행간에  '게으르고 의지박약에 살 의욕 안 생기고 바지런히 살 동기도 안 생기는데 어찌해야 하나.'는 생각들이 읽혀서, 제가 우울증을 극복하기 시작한 계기 중 일부에 대해 써봅니다. 우울증은 천의 얼굴을 가집니다. 그러니 우울증에서 회복되어가는 과정도 천의 얼굴을 가지겠죠. 제 경험은 천가지 중 한 가지의 예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듯싶습니다. .

 

제가 변화하기 시작한 건, 현재 제 상황을 수용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제 끔찍한 상황들, 게으르고 의욕 부족하고 책임감 눈곱  만큼도 없으며 비겁하고 핑계는 기가막히게 잘 대고 타인에 대한 공감은 '말'로만 하고, 한국 사회가 원하는 아지 기초적인 인간의 도리는 전혀 하지 않는, 그런데도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 조차 제대로 못하는 인간 버러지 수준의 상황. 더 나아가 하는것 없이 먹는 나이부터 암울한 장래성에 쌓아놓은 것도 손에 쥔 돈도 없는 비참한 외부 조건들까지. 이 모든 것의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바로 내가 지금 있는 자리이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벗어나고 싶어도 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조금씩 수용하면서부터...그러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음... 그 수용이란은, 지금 상황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네, 압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니가 게을러서 그런데 누구 탓을 하냐. 의지 약하고 자제심없고 게으르고..다 니탓이지!' 하는 식의 말은 다리뼈가 다 으스러진 사람에게 '왜 못 달리냐. 모든 인간은 달릴 수 있는데 어디서 달리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워 쓰레기아니야' 하는 식으로 힐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 다리뼈는 으스러진게 외부에 보이지만 뇌세포가 오그라들고 괴사해서 죽어가는 꼴은 외부에서 안 보이잖아요. 심지어 환자 본인이 제일 열심히 자기를 두드려팹니다. '이 쓰레기야 니 같은 건 살아서 뭐하냐 진짜 죽자...남 피해주지 말고 더이상 비참해지지말고 그냥 사라지자...' 자기 뇌가 망가진 건 전혀 안 보이는 법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그렇게 된 건 다 니탓!'이라는 말은 우울증을 악화시키는 '자학'에 가깝습니다. 심리치료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환자들이 '자학'하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말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인식한다'는 것은, 완벽주의, 강박, 완고, 편협함으로 무장하여 자신에 대해 비정상적인 공격을 하는 저런 '자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저 지금 상황이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의 결과이며, 나는 단지 과거 일의 귀결을 경험하고 있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도 지금 이 상황,  지금 내 모습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적 감정이나 거부감이나 반동 없이 그저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겁니다.

 

그리고 저렇게 '수용'하는데 핵심이 된건 '나, ego는 없다'는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저는 그 언저리에 명상을 기반으로 한 영성들 (불교는 물론이거니와 에크하르트 톨레나 데이비드 호킨스, 기적수업 류 혹은 기독교 전통 중 일부..)이 '저 자신에게는' 진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명상 중 경험한 소소한 일들 때문일겁니다. 또 그들의 서적을 읽으면서 사실 약물이나 인지치료가 준 것 보다 훨씬 더 큰 위안과 치유력과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얻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네들의 공통된 가르침은 'ego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전 이 사실을 인지치료의 '내 생각은 내가 아니고 내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는 생각과 감정을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심지어 바꿀 수도 있는 나일 뿐'이라는 로직을 통해서도 새삼 확인했습니다. '그럼 내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는 그 나는 누군데. 내가 나라고 알고 있던 생각,감정의 덩어리는 그저 나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무언가인가?' 더구나 정말 끔찍하게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던 밤에, 저는 누구에게 바치는지도 모를 기도를 하다가, 에크하르트 톨레가 했다는 경험..그러니까 고통받는 나와 그걸 바라보는 나와의 분리...를 기억하고,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는 나로부터 분리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울감이 사라졌죠.  하여간...완벽하게 몸으로 깨치고 모든 일상을 'ego가 없는 상태'로 살아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경험을 통해 ego가 존재하지 않는구나..혹은 내가 나라고 알고 있던게 사실 내가 아니구나...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앎은 '지금 내 상황을 수용'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어요. 사실 내가 있다면, 그리고 그 내가 저질스펙에 저질인간성에 기타 각종 저질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나라는 존재'가 멀쩡히 있는 상태에서 그걸 수용하는 건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내'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래요. 그냥 이 생각 저 사고 이 경험 저 기억이 합쳐져 뭉뚱그려진 복잡한 덩어리일 뿐이랍니다. 그러면 받아들이기 쉬워집니다. 어차피 그 허상의 뭉텅이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사고가 끼어들면 또 변할 것이고,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를 테고, 결국 그것도 '나'는 아니고 내 옆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혹은 나와 동행하는 다른 무언가...니까요.

 

하여간 이런 식으로 되다 보니 지금 내가 있는 상황을 수용하게 되었고, 늘 자학으로  두들겨 팼던 나 자신도 훨씬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정한지 알 수도 없는 기준대로) 제대로 잘 되어야 하는데 못되고 있는 , 그래서 실망스럽고 혐오스러운 나'가 아니라, 그냥 '우울증과 과거 경험과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잘못된 방식으로 반응하다가 그게 습관으로 굳어진 기억과 감정과 습관의 덩어리...(이자 나와 같이 가는 무언가..)로 생각하면 훨씬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지금 상황과 내 모습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태도를 바꾼 순간...모든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아주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저 자신도, 그리고 제 주변 환경도 동시에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에 걸쳐 동기도 서서히 돌아오고, 의욕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난 행복해지겠다'며 행복연습 일기를 쓰고 있잖아요.

 

 

음..;; 별로 과학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된 것 같은데, 그냥 제가 삶의 동기가 생기기 시작한 (다양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저러하다는 것을 밝힌 겁니다. 제 경험이에요. (아 참, '수용'이 치유에 핵심이라는 것은 연구가 꽤 되고 있습니다. ego가 없다 이건 뇌과학에서 이야기는 하는데 삶의 태도로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전 지금도 '마음챙김' 상태에서 '현실 생활에서 활동하는 ego'를 '지켜보는 나'가 제대로 깨어있으면, 삶에 대한 의욕, 동기가 잘 유지됩니다. 현실 속의 ego 상태에서는 의욕, 동기, 삶에 대한 열정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사는거에요-_- 습관화된 패턴대로, 가끔은 웃고 즐거워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정신없고 피곤하고 지루해하고 짜증내며...

 

하여간 수십만 가지 우울증 스토리 중 한 가지에 해당하는 제 우울증 회복 과정의 초입은 저렇습니다.  다른 분들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우울증 혹은 삶에 대한 열정 없음, 의욕 없음을 극복하기 시작하셨을 테죠.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고,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중요한건...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찾게 된다는 겁니다. 전 제가 찾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것도 저런 이상한(-_-;;) 방식으로. 지금 괴로워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찾으실 겁니다. 잃어버린 동기와, 삶의 의욕이 되돌아 오는 계기, 자신의 이야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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