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비홍 소림권

2023.07.07 15:05

돌도끼 조회 수:257

정창화 감독 1974년작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와 한국의 합동영화사가 공동제작해서 1974년 연초에 홍콩에서, 얼마 뒤에 한국에서도 개봉했다고 합니다.

그시기에, 홍콩 사람들이 다 만들어 놓은 영화에다 더빙만 해놓고 합작이라고 우기던 짜가 합작 영화들이 난무했었는데 이 영화는 홍콩판 크레딧에도 합동영화사 이름이 올라있는 보기드문 진짜 합작영화입니다.
그치만 흔한 짜가 합작영화들이랑 별다른 차이점은 안보입니다. 그냥 홍콩 영화에 한국 배우 몇이 조연으로 출연한 정도라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서 만들었던 (합작이 아닌) 다른 영화들과 다를게 없습니다.

이 영화는 아마도 한국에서 맨처음 소개된 황비홍 영화일 겁니다. 근데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황비홍이란 세글자는 전혀 의미가 없었기 땜에 한국 개봉명 및 주인공 이름이 '황비'로 개명당했습니다. 황비홍이란 이름의 어감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름을 바꾸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황비홍의 본고장인 홍콩에서는 대박이 났다고 하는데 한국 개봉관 성적은 2만명 정도였다고 하네요. 아무리 그시절이라도 히트했다 보기엔 좀 애매한 수치인 것 같은데... 황비홍이란 인물 자체도 낯선데다가 출연진들 중에 이소룡 영화로 이름이 나 있었던 묘가수 정도를 제외하면 그시기에 한국에서 먹힐만한 사람들이 나오질 않으니 대박은 힘들었겠죠.

황비홍 영화는 홍콩에서는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40년대말 대륙이 공산화 되면서 그때까지 중국 영화의 중심지였던 상해 영화계가 무너지고 대륙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대거 홍콩으로 밀려오면서 홍콩이 졸지에 중국 영화의 중심지 자리를 넘겨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원래부터 홍콩에서 일하고 있던 영화쟁이들한테는 썩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강력한 경쟁자들이 대거 몰려든 거니까.
더 큰 문제는 대륙이 폐쇄되면서 그동안 홍콩 영화계를 지탱해온 뒷받침이었던 광동성으로의 수출이 막히게된 거였습니다. 일개도시에 불과한 홍콩에 지역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영화산업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같은 언어를 쓰는 광동성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이때 홍콩의 광동어 영화계가 자구책으로 빼어든 비장의 카드가 황비홍 영화였다고 합니다.

황비홍은 생전에는 (아마도 살고있던 동네 인근에서는 이름좀 날렸겠지만 전국구급으로 가면) 듣보인 사람이었습니다. 황비홍이 유명해진 건 근래들어 엽문이 유명해진 과정과 좀 비슷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존재도 모르고 있던 엽문이란 분이 그 제자 이소룡으로 인해 덩달아 유명해져서 나중에는 액션 히어로로까지 재포장되게 된 것 같이, 황비홍도 역시 황비홍 본인은 무명이었지만 그 제자인 임세영이 근현대 중국 무술계에서 알아주는 네임드 홍권종사입니다.
임세영은 말년에 홍콩에 정착해서 홍가권의 보급에 힘쓰게 되고, 이시기 쯤에 황비홍문파 사람들이 '우리 싸부님은여~~'하고는 문파의 홍보도 겸해서 이런저런 무용담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황비홍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이 크게 인기를 끌자 다른 작가들도 합세해서 셀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되어, 40년대 말쯤이면 황비홍은 홍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슈퍼히어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황비홍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의 출처가 대부분 '소설'이란 것과 그나마 정통성이 있다싶은 것도 순전히 황비홍 문파 사람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 교차검증이 가능한 게 1도 없다는 건데, 아니 뭐 그렇게 많은 무용담을 남겼다면 그에 따른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있을텐데 1도 없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긴 합니다만... 뭐 사람들이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나요ㅎㅎ

황비홍이 소재로 채택된 데는 말이 안통하는 지역의 시장을 개척해야 하므로 '세계공통의 언어인 액션' 히어로로서 적합하기도 했고 광동어 영화라는 자존심도 작용했다고 합니다. 광동출신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광동의 지역색을 영화에 집어넣자고 했다나봐요. 황비홍 영화에 뻑하면 사자춤이 나오는 것도 그때문이라고...

결과는, 1949년에 최초의 황비홍 영화가 나오고 나서 50-60년대 사이의 10년동안 황비홍 영화가 거진 60편은(혹은 그 이상)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니까 그시절에 홍콩 사람들은 거의 두달에 한편 정도는 극장에서 황비홍 영화를 봤단 소리죠. 그리고 동남아에서도 꽤 흥해서 시장개척이라는 미션도 성공했다나봐요. 뭐, 영화사가 급전이 필요하면 '우리 황비홍 영화 찍는데...'라는 소문만 내면 투자자가 돈을 들고 줄을 섰다는 소리도 있으니...

더 놀라운 사실은 저렇게 많이 만들어진 황비홍 영화의 99% 정도를 한사람의 배우가 독점했다는 겁니다. 관덕흥.
홍콩 사람들에게는 관덕흥이 곧 진짜 살아있는 황비홍이었습니다. 요즘도 캐릭터와 배우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땐 더 심했죠.
60년대 이후로 황비홍 영화의 제작편수가 뚝 떨어진 것도 관덕흥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황비홍 역을 했을 때 나이가 40대 중반이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황비홍으로 나온다는 건 생각도 할수 없고...
그래서 점점 제작텀이 길어지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그때쯤부터 홍콩영화계는 관덕흥의 뒤를 이을 새로운 황비홍 스타를 물색해봤지만 다들 단발성으로 그쳤죠(심지어 성룡도 그중 한명)

그러다가 1974년, 한동안 신작이 안나오면서 이제 끝났나보다 생각하고 있던 관덕흥의 황비홍 영화가 다시 나오게된 것입니다.
이래저래 색달라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감독이 정창화, 즉 외국사람입니다. 그리고 북경어로 제작되었어요.(광동어 더빙판이 있긴 한데 입모양 하나도 안맞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태국.
그러니까 황비홍 영화에서 광동이라는 지역색을 완전히 버린 거죠. 아마도 지역색을 빼고 세계화를 노리지 않았나싶긴 한데...

시기상으로 이소룡이 등장하면서 쿵후영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고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던 때입니다. 기존의 황비홍 영화도 쿵후영화의 선조격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이소룡 이전의 무술영화와 쿵후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배우들의 운동량입니다. 쿵후영화는 출연배우의 신체능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예 나올수도 없는 분야죠.
관덕흥은 황비홍 이전에도 경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분이고 황비홍 역할을 하면서는 황비홍 제자들한테 홍가권 등을 전수받아 실제 무술고수입니다. 하 지 만, 당시 관덕흥이 지금의 성룡 나이정도였습니다.

70을 눈앞에 둔 노인이 가장 체력적으로 빡센 쿵후영화의 주인공을 한다는 거죠.

지금 시대에도 성룡이 하는 무술연기를 보면 신나기보다는 안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 지경인데 성룡은 당시의 관덕흥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발전한 영화 기술의 덕을 보고 있고 거기 더해서 역시 당시와는 비교도 안되게 발전한 의학과 체력관리 기술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70년대의 70세와 지금의 70세는 의미가 다르죠.
70년대 초에 70을 코앞에둔 노인이 쿵후영화에 나온 겁니다. 당시의 홍콩 관객들의 감회가 어땠을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룡, 혹은 인디아나 존스 최신작을 보면서 느끼는 세월의 무상함일지...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순진했던 당시 관객들은 영화속에 나오는 (대역이 펼치는) 액션을 보고서는 '와  저 나이에 아직도 저런 액션을~'하며 감탄을 했을지도 모르죠 영화가 대박났다는 걸 보면...

영화의 스토리는 태국이 배경이라는데서 알수있듯이 '당산대형'과 대동소이합니다. 태국에 간 황비홍이 현지에서 악행을 벌이고 있던 중국인들을 때려잡는다는... 주연배우들 안나오는 스틸사진들만 보면 '당산대형'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그림도 대략 비슷합니다.
당시 홍콩 영화가 다 그랬듯이 고증같은 거엔 별 신경 안썼습니다. 황비홍을 비롯한 중국인 캐릭터들은 중화민국 초기쯤 복식을 하고 있는데 배경의 태국 풍경이나 엑스트라들 복장같은 건 걍 현대ㅂ니다.

썩 재미있다고 하긴 어려운 스토리입니다.

관덕흥 혼자 극을 이끌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서인지 황비홍은 중심사건에 직접 관여하진 않고있다가 마지막에 나서서 해결하는 역할이고 사건에 엮이는 건 두명의 제자들, 황가달과 홍금보입니다. 황비홍 사가에 단골로 나오는 네임드 제자들은 하나도 안나오고 둘 다 오리지날 캐릭터들입니다.
황비홍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라 젊은 제자들의 가치관과 충돌하는데 이게 영화 내용과도 충돌합니다. 이 영화는 싸우는 장면을 길고 자세하게 보여주는 플로이테이션 영화=쿵후 영화입니다. 근데 황비홍의 가치관은 '싸우지 말라'입니다. 액션을 보여줘서 먹고사는 영화인데 주인공 가치관이 '액션 하지마'인 거죠.

주인공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라, 말이 통하지 않는 악당들을 상대로도 원칙만 고수합니다.  악당들이 온갖 악행을 일삼고있는 중에도 황비홍 혼자 고고하게 '싸우지 말고 어지간하면 내가 참자'를 관철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가 지나쳐서 당연히 나서 싸워야할 상황에서도 싸움을 못하게 봉인해버립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계속해서 시궁창, 고구마전개가 이어집니다.

현대의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아무리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절대 싸우면 안된다가 정답이긴 합니다만, 이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목적으로 만든 환타지인데 그안에서 이상 타령만 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 속터지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싸움실력을 봉인한 고수'이야기를 별로 안좋아하는데 70년대 당시에는 이런 내용의 무술영화가 참 많았어요. 그러니 이 영화가 딱히 유별난 건 아닙니다. 당시엔 이런 이야기가 먹혔겠죠. 어쩌면 이 영화에서는 관덕흥에게 운동을 덜 시키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르죠.

영화의 무술지도는 홍금보가 맡고 있습니다. 동시기 영화들에 비하면 평균이상은 되지만 이 영화 전후로 나왔던 '여당수' '흑연비수' '흑권' '사대문파' 같은 영화들이 지금 보기에도 감탄스런 액션장면들을 품고있는 거에 비하면 기억에 남을만한 인상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더욱 아쉬운 건 끝판왕으로 무려 황인식을 모셔왔음에도 그렇게 인상적인 액션을 보여주진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다 황인식의 상대역이 관덕흥입니다. 아무리 황인식이라도 노인학대를 할 수는 없으니...
관덕흥은 체력을 많이 요하는 부분은 당연히 다 대역이지만 그래도 클로즈업 장면들에서는 역시 관록을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는 관덕흥이 주인공으로 나온 사실상의 마지막 (극장용) 황비홍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황비홍역으로 몇편의 영화를 더 찍기는 했지만 홍금보, 원표 등 젊은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사부님 역으로 나왔습니다. 그렇게해서 80년대 초 관덕흥의 황비홍 시대는 막을 내렸고 그뒤 10년 정도 황비홍 영화가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관덕흥 아닌 다른 배우가 황비홍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대체불가한 아이콘이 되어버린 배우의 노화... 인디아나 존스의 최신작을 보고선 관덕흥의 황비홍이 생각나서 걍 써봤어요.

'황비홍 소림권'은 요즘 케이블 마이너 영화 채널에서 종종 틀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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