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5 21:32
아가씨를 방금 보고 왔는데, 마음에 안들었던 점이라고 한다면..
극중에서 히데코가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미학이 영화 전체와 겹쳐질 수 있다는 점인것 같아요.
장갑을 낀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차가운 인형처럼 에로틱한 이야기를 읽어가는 미녀를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이
영화가 전달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아름다움과 그렇게 다른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숙희라는 캐릭터가 아무리 거친 말을 씨부리고 질투에 겨워 씨근거려도
코믹한 대사나 컷 조차 구조적인 대꾸를 이루는 꽉 짜여진 형식 속의 일부로 보이지
생명력같은게 느껴지질 않는다랄까
특히 마지막 베드신은 뭐랄까 여러모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정도로 길었던 백작의 최후 분량 이후에 보고나니 더더욱
그냥 예쁜 춘화처럼 감상할만한 퍼포먼스로 자꾸 여겨지게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백작이 아무리 탐해도 가질 수 없었던 히데코가 '여자'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손댈 수 없이 멀찍이 떨어져 외설적인 말들을 읖조리는 입술의 클로즈업 샷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고.. 제 개인적으로는요.
어쨌든 저는 박찬욱 감독하고는 안맞는것 같아요..
금자씨, 박쥐, 스토커, 아가씨, 모두 괜찮은 영화라는 생각이 안드네요 ㅜㅜ
2016.06.05 21:59
2016.06.05 22:04
넹.. 근데 제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탐미적인 영상미에 갇힌채 풀어나가는게 뭔가 의도치 않은 섬뜩한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서요. 굳이 페미니즘을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히데코의 악몽같았던 세계가 전복되고 파괴되어야 하는데 파괴된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더 큰 감옥이 있고 그 감옥이 영화 자체인 느낌? 잘 표현이 안되네요. 그리고 그게 감독이 의도한 어떤 것이 아니라면 영화 자체가 뭔가 되게 잘못만들어졌다는 느낌까지 들어요. 이건 그냥 제가 유독 형식미나 영상미에 별 감흥을 못느끼는 편이라 그런것 같기도 하구요.
2016.06.05 22:13
그렇게 느끼고 평하는게 어쩌면 객관적일 수도 있을것 같아요.저는 박찬욱이 만드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에 쉽게 수긍하는 편이라 객관적이지 않을것 같은 느낌..
말씀하신 <히데코의 악몽의 세계>들은 사드 후작 소설들의 극단적이고 괴상한 취미를 가진 캐릭터들, 그 소설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적 취향, 우스꽝스럽고 가볍게 이죽대며 수사로 가득한 문체 등의 느낌을 그대로 따오고 있다고 느낀지라, 그 세계가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고, 또 철저하게 파괴되지 않은 점도 그냥 원래 그런거지..하고 받아들였던것 같기도 해요. (다른 얘기일수도 있지만 그 씬들이 별로 재미는 없었다고 느끼긴했어요.많이 지루하더라고요. 숙희와 히데코가 부딫치는 장면들은 모두 활력이 확 사는데 그 외의 씬들은 굉장히 고루했던...)
2016.06.05 22:23
이 글을 보니 박찬욱 감독이 의도했던게 뭐였는지 좀 알것 같기도 하네요. 사실 정말 모르겠어서 '완전히 다 잘못 만들어버린 것 아닌가' 라고 의심했었던것 같아요.
제가 말한 '히데코의 악몽같은 세계'는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설명하는게 맞는듯합니다. 성적 취향의 기괴함만이 문제가 아니라 히데코의 욕망이 배제된 채 철저히 대상화되고 착취당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던게 더 중점적인 문제, 더 심각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런 문제를 캐치는 하더라도 별로 관심을 두진 않은 것 같아요.
저도 그 부분들이 고루했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전 그래도 약간의 민망함은 느꼈는데 충격같은건 없더군요.
2016.06.05 22:30
그게 제대로 전달 된것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지만 말씀하신 부분을 염두하긴 한것 같아요. 이런 인터뷰 내용이 있네요.
'낭독회 장면 중에 정전이 된다. 사람들은 동요하지만 정작 책을 읽는 히데코는 동요하지 않고 내면으로 빠져든다. 그러면서 숙희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한다. 변태적인 남성들의 강요에 의한 낭독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 것으로 희열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컷에서 첫 정사 장면으로 이어진다.'
전 원작 <핑거스미스>를 읽지 않아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데, 아래 댓글을 보니 핑거스미스에서도 성적 착취를 당했던 여성은 결국 야설작가가 되었다.고 어떤분께서 언급하셨던데, 어쩌면 박찬욱이 이 원작을 해석하면서, 말씀하신 그 세계는 애초 주인공에게 파괴되어야만 하는 공간이 아니었을수도 있을것 같아요. 양면을 가진 공간, 주인공의 자아와 주체성이 깨이는 공간으로 여긴 면도 있지 않나..
근데, 이 영화를 보기 전 듀게의 어떤분께서 올리신 글을 읽었을때는 '네 인물 각자의 욕망이 노골적인 영화.'라고 쓰셔서 그렇게 알고 갔었거든요. 근데 제가 느꼈을때 첫번째 에피소드의 소매치기 하녀를 제외하고는 다른 캐릭터들의 의중이나 정서는 썩 그렇게 명확하게 그려진 영화로 보이진 않아서... 저도 히데코가 그곳에서 자신의 욕망을 명확히 구현하고 있다고 보진 않았던것 같아요.,
2016.06.05 22:42
이야기를 여기까지 진전시킬수 있어서 기쁘네요. 제가 박찬욱 감독이 캐치는 한것 같다고 이야기한게 바로 말씀하신 그 장면 때문이었어요.
이전의 낭독 내용이 히데코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 희열을 느끼는 장면은 히데코가 자신이 상황에서 이입할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어떤 이야기가 '누구에 의해 말해지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았고 원작에서 주인공이 야설작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정말 그 '악몽'-착취당하고 대상화되는 세계-를 파괴하고 탈출한 것처럼 여겼어요.
왜냐하면 같은 변태적인, 혹은 성적인 이야기라도, 또 그것을 읽고 말하거나 쓰는 행위라도 그것을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라는게 더 중요한 것일 수 있으니까요.
욕망을 공유하지 못하는 공유하려고 하지도 않는, 말끔한 거리감을 유지한 남자들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지.
박찬욱이 그것을 염두에 두거나 캐치했으면서도 크게 관심을 두진 않은것 같다고 본 것은 이런 시각이 결말부까지 밀어붙여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어요.
말미에 이어지는 이모부와 백작의 긴 대화는 히데코와 숙희의 이야기를 다시 그들을 탐미적으로 바라보고 소비하는 이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면이 있는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그 이후의 베드신에 대해서도 행위를 하고 있는 당사자 두 여인의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악몽 속의.. 이번에는 관객이 낭독회의 청중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것처럼 느껴졌구요.
2016.06.06 19:03
저도 동일한 아이러니를 느꼈는데요, 숙희가 서재를 파괴하는 장면에서 상당한 쾌감을 느꼈는데, 이후 다시 찝찝해졌어요.
그리고 과정에서도 관객 입장의 시각을 어디에 둬야 할 지 허둥지둥했어요. 그네들을 함께 비웃으려면 탈출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정사신까지 다 훔쳐보죠.
어쩌면 연출된 장소에서 주어진 낭독만 보는 사람들보다 더 하다고 할까요. 심지어는 지하실까지 알고 있죠. 마지막 씬은 정말이지...
관객 중 한 명이었던 제 입장으로는, 아가씨와 함께 탈출하기보다는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손이 짤려 벌을 받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기사 영화 전체에서 관객이 감정 이입할 상대는 없고, 유령처럼 부유하면서 제 3자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런 찝찝함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겠죠.
에로시티즘 소비를 파괴하는 에로시티즘 작품을 어떻게 편한 마음으로 보고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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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이 탐미적인 영상미에 좀 갇혀 있죠. 예전 친절한 금자씨의 대사 '예뻐야해. 뭐든지." 는 분명 박찬욱 감독의 영화모토가 아닐까.
그런데 박찬욱이 구축하는 그 정도 형식미라면, 설령 그게 영화를 잡아먹고 뭐든걸 팬시하게 만든다 한들 언제나 재밌게 즐기게 되긴 하더라고요.
근데 이영화를 보며 저도 좀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요. 언제나 같은 시나리오 파트너, 같은 미술,의상팀, 같은 촬영팀과 같은 음악감독안에서 매번 자매같은 영화들을 만들고 있는데,작정하고 한번 싹 물갈이 해보면 어떨까 싶은..
(스토커가 그런 영화겠지만..이건 온전히 박찬욱 영화라 할수 있나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