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 13:25
어제 저녁에 영화 Zodiac(2007)을 봤어요.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2000년~2010년 사이에 개봉된 영화들을
많이 못 봤는데 그 후에 나름 찾아보고 있지만 여전히 못 보고 있는 게 많죠.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였어요.
제가 연쇄살인범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지나친 공포감이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스펜스 스릴러
보는 걸 좀 힘들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제목은 들어봤지만 미뤄두던 영화였는데 어제 우연히 이 영화의 주연이
제이크 질렌할과 마크 러팔로라는 걸 알게 되어 바로 찾아봤죠. ^^
등장인물도 많고 얘기도 복잡하고 한글자막이 없어 영어자막으로 보다 보니 사람 이름도 막 헷갈리면서
내용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지경인데 그래도 재밌더라고요.
두 시간 반이 좀 넘는 긴 영화라 중간에 잠시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무서운 순간이 별로 없어서 제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냥 집중하면서 쭉~ 보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김기덕 감독 인터뷰에서 프랑스에 있을 때 <양들의 침묵>과 <퐁네프의 다리>를 재밌게 봤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상영되었을 텐데 재미있었느냐고 기자가 질문했던 것 같은데 김기덕 감독 대답이
잘 만든 영화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재밌다는 거였죠.
당시엔 이 인터뷰를 보면서 역시 영화는 말보다는 보여주는 이미지가 중요하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그후 가끔 김기덕 감독의 말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자막 없이 영화를 보기도 했고요.
(이 테스트를 통과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제 <조디악>을 보다가 갑자기 이 인터뷰 생각이 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퐁네프의 다리>는 파리 시내 모습도 좀 보여주고 멋진 야경도 보여주고 했던 것 같은데
<양들의 침묵>은 멋진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도 아니고, 그래도 뭔가 좀 알아들어야 재밌을 것 같은 영화잖아요?
저는 첩보 영화가 관객이 이해하기 힘든 전문용어를 써가며 복잡한 대화로 진행되거나 화면을 현란하게 만들어서
'관객인 당신이 못 알아들을 테니 나는 더 멋있는 영화'라는 인상을 주는 듯하면, '그래, 나는 복잡하고 정신 없는
이야기는 못 알아들어서 흥미가 없으니 이만 꺼야겠어' 하고 그만보는 인내심 부족한 관객이거든요. ^^
그런데 <조디악>을 보면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집중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특별히 영화의 촬영이 멋있게 된 것 같지도 않고 화면발로 제 마음을 사로잡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데이빗 린치 감독의 몇몇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있었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시선을 뗄 수 없는, 영화에 빨려들어가는 느낌 같은 거요.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는 좀 더 관능적이라고 할까,
시각적으로 좀 더 자극적인 화면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조디악>은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서스펜스 스릴러를 부담스러워 하고 스토리도 제대로 못 따라가는
저를 끝까지 집중해서 보게 만들었으니까요. ^^ 그래서 좋은 영화에 대해 제가 갖고 있던 희미한 기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죠.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돼도 보고만 있어도 그냥 재밌고 끝까지 관심을 유지하며 보게 만드는
영화가 저에게는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
내용이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필수 요소인지 선택 요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글이든 영화든 어려운 건 싫어하는데... 단지 언어의 문제로 이해가 안 되든, 영화가 선택한 이야기 자체가 어렵고
모호해서 이해가 안 되든, 어려움을 전제로 깔아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그 어려움을 견디면서 이해해 보려고
애쓰도록 만드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인 것 같기도 해요.
듀게분들은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계신가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이런 조건을 만족하면 나에겐 좋은 영화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거요. ^^
2016.03.08 13:33
2016.03.08 16:01
어제 영화 보면서는 연기 잘하는 남자 배우들에게 혼이 빠져서 여자 배우 이름은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클로에 세비니라는 배우네요. 영화의 안경 낀 모범생 같은 얼굴과 imdb에 있는 프로필 사진의 얼굴이
너무 달라서 이름 확인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시는군요. ^^
2016.03.08 14:05
[양들의 침묵] 의 원래 미국판 예고편은 너레이션은 커녕 대사도 한 마디도 안나오고 배경과 캐릭터들의 클로즈업이 아무런 맥락의 설명 없이 계속 등장한다는 얼핏 보면 단순한 구성이었는데, 극장에서 보던 (미국) 관객들이 완전히 찍소리도 못하고 제압당했었죠. 그 입구멍에 철창을 둘러싼 마스크를 쓴 렉터박사가 화면 가득히 나타나자 관객중 일부가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기억나는군요.
2016.03.08 16:15
저는 사실 스릴러 영화에 별 관심이 없어서 <양들의 침묵>도 한 번 보고 말았는데
나중에 자막 없이 보면서 화면만 보면 어떤 느낌인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어요.
<조디악>을 보면서 멋진 화면이나 자극적인 효과에 기댄 것도 아닌데 영화 내내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지더군요.
2016.03.08 14:53
개인이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장르물 전부를 좋은 영화라고 판단하진 않지요. 또 어떤 장르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런 범주 전체를 안좋은 영화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없을 거구요.
저는 범죄스릴러를 좋아하지만 그 안에도 졸작들이 있어요.
가급적 사건에 대해서 건조하게 접근하고 사건의 주변이나 현실을 통찰력있게 묘사하는 영화나 소설류를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조디악 정말 재미있지요. 당시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며 홍보했었는데 좀 먹혔었죠. 이런 연기를 하는 제이크 질렌할도 좋아해요. 최근작 나이트 크롤러도.
2016.03.08 16:29
예전에 영화 <심플 플랜>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통찰이랄까 그런 걸 좀 엿본 느낌이었요.
스릴러는 어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기에 참 좋은 장르 같아요.
(그래도 가슴 조이는 느낌이 싫어서 잘 안 찾아보지만 ^^)
제이크 질렌할은 뭔가에 집착하는 연기를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2016.03.08 16:01
2016.03.08 16:46
"지금 보고 있는 영화가 동일한 배우들이 점심을 함께 먹고 있는 걸 찍은 다큐멘터리만큼 흥미로운가?"
라고 일단 해석을 해 놓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글신께 물어봤더니 배우의 앙상블을 중요시하라는
말이라고 하네요. ^^ 배우 한 사람의 훌륭한 연기가 아니라 출연진들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지
보라는 것 같아요.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배우들이 점심 먹으면서 서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저는 몹시 궁금할 것 같은데 그것보다 영화가 더 궁금하면 좋은 영화라는 것 같기도 하고요. ^^)
영화평론가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영화의 판단 기준을 알아보는 것도 재밌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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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찾아보니 배우들이 밥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 두서없이 하며 잡담하는 걸 보는 것보다는
영화가 좀 더 짜임새 있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하네요. ^^)
2016.03.08 18:12
데이빗 린치가 아니라 핀처 말씀하시는 거죠? ㅎㅎ 저도 핀처 정말 좋아합니다. 조디악은 재밌을 게 없는데 지루하지 않아서 볼 때마다 신기한 영화... ('나를 찾아줘'나 '소셜 네트워크' 같이 스토리 자체의 극적인 힘이 조디악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여튼 그 지루하지 않음이 연출의 힘이겠지만, 그 힘의 정체가 뭔지 정말 궁금합니다.
2016.03.08 18:42
아, 위에 '데이빗 린치'라고 쓴 건 데이빗 린치 감독 맞아요. ^^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영화를 보면 뭔가 이해가 안 가도 그냥 빨려들 듯이 보게 돼서...
(그나저나 이름이 '데이빗'인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드네요. 린치, 크로넨버그, 핀처,
린, 맥켄지까지 ^^)
2016.03.08 19:13
중학교때 어쩌다 반에서 비디오를 빌려보게 됐는데요
백투더퓨처였어요. 저는 이미 다 본 내용이지만 반애들 대부분은 모르는 영화더군요.
근데 이 비디오가 자막이 엉망진창이었음;;;;;;;;;
오역 난무같은 게 아니라 그냥 감탄사 몇 개나 알기 쉬운 짧은 문장만 간신히 번역해놓은 정도...
그러니 애들이 집중이 되겠어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저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별 수 없었죠.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선 어느 순간 반애들이 몽땅 경청하고 있더라는........
그제서야 저는 이말년 스타일로 코쓱하면서 내심 "훗 이것이 바로 재미있는 영화의 크라쓰지" 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요한 건 그 자막제작자 만나면 엉덩이 걷어차고 싶음
2016.03.08 19:36
저는 나이가 드니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피곤하고 자막 쫒아다니면서 읽는 것도 힘들어서
점점 등장인물이 적고 대사가 적은 영화를 선호하게 되는데 ^^
정말 좋은 영화는 자막을 극복하는 것 같아요. 대사가 적든 많든 배우의 표정과 움직임과 화면에 담긴
것들로 뭔가를 말해주고 있어서 그것만 붙잡고도 영화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쫒아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가 문학보다 더 보편적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자막의 벽도 뛰어넘는 영상의 힘 때문에 ^^
2016.03.08 22:01
저도 상당히 재미있게 봤던 영화인데, 전 이거 볼 때 건강식 먹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모든 장면장면이 중요하고 치밀하게 계획되고 짜여져 있어서 틈이 없는 것 같지만, 강약조절이 잘 되어 있고 리듬감이 좋아서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을 주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쯤에 제이크 질렌할이 밤늦게였나 새벽에 마크 러팔로 찾아가서 식당에서 둘이 마주앉아 얘기하는 장면인데, 둘이 대화하는 장면만으로도 긴장감이 고조되는게 아주 좋았죠. 만든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정확하게 알고 능숙하게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인데, 또 그걸 너무 잘해서 같이 따라가 주는게 즐거웠어요.
2016.03.08 23:56
저는 어떤 영화를 재밌게 봤을 때 그 이유를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는데
<조디악>은 왜 재밌었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ㅠㅠ
(제가 좋아하는 장르도 아니고 내용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데... orz)
영화 내내 한번도 주의가 흩어지지 않고 쭈~욱 집중이 됐던 것도 신기하고요.
이 영화에 대한 분석글을 좀 찾아서 읽어보면 이유를 알게 될지....
2016.03.09 00:26
뭔가 비슷하면서도 반대인게 저는 자막이 없어도 못만든 영화는 못만든 영화인게 티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오히려 자막이 없으니까 안좋은 부분이 더 많이 보일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악명 높은 '더 룸'을 자막 없이 봤지만 토미 웨소의 연기가 형편없어서 빵 터질 정도입니다.
저는 영화 속 음악이 좋으면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특히 미국의 청춘물들은 영화 자체가 그저 그래도 음악빨로 극복되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플라시보, 팻보이 슬림, 블러, 더 버브 등의 곡들이 삽입된 'Cruel Intentions'는 이전에 쇼 데를로 드 라클로 원작을 각색한 1988년작보다 밀도는 낮을지라도 좋은 음악 덕분에 몇번을 봤어요.
2016.03.09 01:01
그렇죠. 못 만든 영화가 자막까지 없으면 버틸 수가 없죠. ^^
얼마 전에 Tron: Legacy OST 몇 곡을 들어봤는데 음악이 멋지니 SF영화에 관심 없는 제가
영화를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들랑말랑 하더군요. ^^
Daft Punk - Adagio for T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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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el Intentions에 좋은 노래가 많이 있었군요. O.O 지금 몇 곡 찾아서 듣고 있어요.
Craig Armstrong - This Love (feat. Liz Fr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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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스쳐지나가듯 아 저거 내 취향, 이런거요.
이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