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1, 2>는 참 따뜻하고 유머가 넘치는 소설이었어요. 


3대에 걸친 사람들의 사랑과 증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독자를 코너로 몰아붙여 지치게 하거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더군요. 


다른 일 때문에 좀 쉬었다가 다시 책을 집어들어도 바로 집중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요. 


이 책은 에스테반 트루에바라는 남자, 로사라는 여자를 사랑했고 클라라라는 여자의 남편이었으며 블랑카의 아버지이자 


알바의 할아버지인 한 남자의 삶, 그리고 그가 사랑하고 괴롭혔던 여자들의 삶을 재미난 옛날 얘기처럼 술술 풀어나가요. 


저는 영화든 소설이든 등장인물이 많고 얘기가 복잡해지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재미를 잘 못 느끼는 사람인데 이 소설은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각 부분에서는 한두 사람에게 집중하기 때문인지 누가 누군지 헷갈리지 않았고, 읽자마자 뭘 읽었는지  


다 잊어버렸던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 소설 <백년의 고독>과는 다르게 읽는 동안 제 기억 속에서 꽤 오래 버텨주었어요. ^^


거기다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예고편처럼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슬쩍슬쩍 흘려주는데 그 예고편들이 궁금증을 계속 


유발하면서 책을 계속 읽게 만들더군요.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들은 대부분 초반 50페이지 정도까지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을 못 잡고 인내하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소설은 처음에 조금만 열심히 읽기 시작하면 금방 초절정미녀인 로사가 등장하고 


이 책의 주인공인 악당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시작되면서 바로 재밌어져요. (야한 장면들도 많고요. ^^)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한국의 몇몇 아버지들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다혈질이고 완고하고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죽어라 일해서 상당한 부와 지위를 얻지만 


결국 누구의 사랑도 얻지 못하는, 그가 축적한 재산을 아낌없이 쓰는 것 말고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 


사랑을 강요해서 얻어내려고 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아내와 자식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그들이 먹을 것, 입을 것에 곤란을 겪지 않도록 돌봐주는 것에는 열심인 사람. 


2권의 마지막 100페이지 정도는 갑자기 비극적인 분위기가 되면서 손녀 알바의 고난을 그리고 있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따뜻하고 


마술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멋진 신세계>는 이 소설에 제가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어요. 과학기술에 기반하여 인간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보여주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 (교훈적인 한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소설을 읽어서 뭐한담 


했었죠. ^^) 그런데 역시 고전은 한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없을 때 고전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반성했어요. 


이 소설은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어요.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으로만 살아가려고 기를 쓰던


이십 대 초반에 이 책을 읽었으면 감정이라는 것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삶을 생생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임을 좀 더 일찍 알았을 텐데...


저는 제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며 이런 감정들을 제거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죠. ^^ 


이 소설은 그런 노력이 성공했을 때, 태아기와 유아기의 성격 형성 과정과 소마라는 약물 주입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 


미래에 자신이 처할 상황에 완벽히 만족하도록 과학적으로 통제되었을 때 인간이 어떤 모습일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 소설에서 태아는 엄마의 뱃속이 아니라 유리병 속에서 자라게 되고, 여자가 직접 아이를 낳는 것은 옛날 옛날에 벌어졌던 몹시 야만적인 


행위로 여겨져요. 부모와 자식의 끈끈한 정서적 관계조차 상당히 혐오스러운 옛날 옛적의 미개한 관계로 간주되고요. 


부모와 자식 간의 이런 신체적, 감정적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이 이 신세계에서 감정 통제의 시작이에요.  


가끔 여성이 출산과 양육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여성 평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 태아기와 유아기를 


국가가 완전히 통제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면 좀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해요. 어쨌든 인간의 취향과 선입견 등이 우리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어릴 적의 경험에 의해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생히 묘사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족 관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감정적인 고통을 느끼는가를 생각해 봐도 인간에게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제거하려면


가족 관계를 제일 먼저 해체하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 


이 소설은 정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줘요. 격렬한 감정은 우리를 동요하게 하고 불안하고 괴롭게 하죠. 


감정은 많은 경우 우리의 시간을 유용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훼방꾼이에요. 


완벽한 감정의 통제로 항상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런 행복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주 많을 거예요.  


자신의 감정,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노력은 강력하고 끈질겨서 인간의 감정에 손대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둬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을 것 같고요. 


이 책의 도입부는 좀 낯선 어휘들로 집중이 잘 안 되는데 50페이지 정도만 읽어보면 바로 몰입해서 읽게 됩니다. 특히 전반부는 충격적인 


내용들로 쉴 틈 없이 읽게 되고요. 중반에 야만인이 등장하면서 살짝 긴장감은 떨어지는데 그래도 계속 재밌다가 후반부에 야만인과 총통의


대화가 전개될 때 아주 흥미진진해져요.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라는 책에서는 안정효 번역(소담출판사)을 제일 잘 된 번역으로 평가하고 있고 그 다음으로 몇몇 번역을 


제시하는데 저는 이덕형 번역(문예출판사)으로 읽었어요. 중간중간 어색한 한국어 문장들이 자주 나왔지만 영어 원문이 뭘 말하려고 했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는 번역이어서 대충 넘어갔는데 그래도 몇몇 문장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있었어요. 


이 소설이 미묘한 분위기 묘사나 섬세한 심리 묘사가 필요한 그런 책이 아니고 내용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조금씩 어색한 번역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진 않지만 <달과 6펜스>, <황야의 이리>, <영혼의 집>을 읽을 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번역 문장의 어색함이 종


종 느껴지긴 했어요. 



후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거기다 중간에 한번 날려먹었어요. 보통 저장 안 된 글은 자동으로 다시 뜨던데 오늘따라 왜 그냥 날아갔는지 ㅠㅠ)


사실 이번 주엔 제 방에 놓을 TV도 한 대 사고 이런 저런 일들이 좀 있어서 며칠 날렸는데 그래도 계획 완수하려고 열심히 읽었어요. 


이제까지 읽어본 결과, 제가 고른 책들을 읽었을 때보다 듀게분들이 추천해 주신 책들을 읽고 난 후의 만족도가 훨씬 높네요. ^^ 


(사실 <영혼의 집>과 <멋진 신세계>는 별로 제 취향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말이죠. 좋은 책 추천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후기 썼어요. ^^) 


이번 주에 읽을 책은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코스모스>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입니다. 


이번 주부터 슬슬 다른 일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아 앞으로 독서 계획에 지장이 생길 것 같기도 한데 이제까지 추천해 주신 책들을 


워낙 재밌게 읽다보니 계속 추천받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만약 다음 주에 읽을 책에 대한 추천이 없으면 저번에 읽으려다 못 읽은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1, 2>나 <면도날> 중 땡기는 책으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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