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UNA 님께서 트위터에 리트윗하신 글을 읽고 무척 감동해서 번역해보았습니다. 《LA 위클리》 영화평론가 에이미 니콜슨이 4월 28일에 쓴 칼럼입니다. 거친 표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을 옮긴 것일 뿐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권의 영화들은 다른 재료를 사용하고 있을 뿐 그 재료 자체로 현대보다 열등한 것이 아님을 항변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분께서 위안 얻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STOP LAUGHING AT OLD MOVIES, YOU $@%&ING HIPSTERS)





옛날 영화 비웃지 좀 마라, 이 XX 힙스터들아


원조 힙스터인 홀든 콜필드는 영화에 관해서라면 머저리였다. 그는 영화를 싫어했다. 배우는 사기꾼이고, 각본가는 창녀고, 질질 짜는 영화를 보면서 코를 훌쩍이는 관객은 “실제로는 씹새끼들”이라고 생각했다.

홀든은 그냥 못난 정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악질이었다. 웃는 녀석이었다. 극장의 다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동안 냉담하게 킬킬거리는 천치였다. 홀든도 인정한다. “나도 만약 영화관 같은 데서 내 뒤에 앉았더라면 아마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여 나더러 제발 입 좀 닥치라고 했을 거라는 얘기다.”

이번 주, 어느 이른바 교양 있는 영화 공연에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홀든을 떠올렸다. LA 오페라에서 이탈리아 공포영화 감독 마리오 바바의 1961년 작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를 상영하면서 23인조 오케스트라와 아홉 명의 가수를 동원하여 대사를 서글픈 음악으로 바꾸어 들려주는 자리였다.

이건 듣기보다 그럴싸한 기획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고상한 비극의 모든 요소를 건드린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인, 사악한 삼촌(젊은 날의 크리스토퍼 리)의 마법에 걸린 여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불멸성을 포기하고 치유법을 찾고자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테세우스 또한 하데스의 딸 페르세포네를 사랑하여 신들의 진노를 사고, 헤라클레스는 그런 친우를 설득하여 그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신의 연인과 그 연인의 왕국을 구해달라고 설득해야만 한다.

바바의 영화는 영화와 연극 사이의 중간지대에 존재한다. 그의 세트는 세트처럼 보이며―그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 다섯 자리 수를 넘어가는 돈을 쓴 적은 거의 없다― 헤라클레스(레그 파크)가 적들을 향해 던지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는 스티로폼임이 분명하다. 바바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대신 인공물을 껴안는다. 그는 스크린을 현란한 빨강, 분홍, 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와 자신을 맞아 주리라 믿는다.

그냥 오페라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극 관객들은 상상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 내 옛 편집자이자 연극 평론가였던 스티븐 리 모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연극과 영화의 차이는 무대 위의 배우는 “들어라, 저기 성이 있다!”라고 말한 다음 판지로 만든 상자를 가리켜도 괜찮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스크린 위에서 벌어질 경우,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근사한 망루와 도개교를 기대한다.

〈지구 중심의 헤라클레스〉를 보러 온 관객들은 스티로폼 바위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크가 입을 벌리고 윤기훈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 마구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다수 사람들은 웃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관객 중 3분의 1은 계속해서 바바의 비통한 환상 서사극을 코미디처럼 대했다. 용암에 타오르는 사람? 웃겨 돌아가시겠네! 목이 잘리는 아가씨? 이렇게 웃길 수가! 마리오 바바가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마리오 바바가 그들에게서 감정을 끌어내려고 한다는 이유 때문에 웃고 있었다. (지휘자 패트릭 모가넬리와 가수들의 감정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 뒤에 앉은 남자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와언 셔츠를 입은 채 사우어 패치 키즈 캔디를 우물거리며 91분 동안 킬킬거렸다. 나는 제우스더러 그 작자에게 스티로폼이 아닌 바윗덩어리를 던져달라고 한참을 간청했다. 그의 집요한 웃음은 자신의 우월함에 대한 광고였다. 가짜인 게 분명한 가짜 바위에 “속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라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꿈을 꿀 수 없을 정도로 쿨하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해 할 만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나는 오페라 관객들이 감정적 방관자로 머무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우리 모두가 일반 영화 티켓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내고 심지어 평소에 신는 것보다 더 좋은 신발을 신는 수고까지 감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지난 몇 년 간 옛 영화를 보러 갔다가 부적절한 웃음으로 감상을 망친 사례가 수차례 되는 데다,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는 것만 같다. 내가 들은 끔찍한 이야기 중에는 관객들이 〈텍사스 전기톱 학살〉, 〈엑소시스트〉, 〈샤이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괴물〉, 〈아라비아의 로렌스〉 그리고 〈대부〉를 보면서 웃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장난해? 〈대부〉를 보면서!? 게다가 심술궂게도, 같은 관객들이 정작 고전 코미디를 보는 동안에는 조용했다. 현대 관객은 과거 사람들보다 한 수 위여야 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건 모두가 지는 경쟁이다. 영화인들의 노력은 무시당하고, 힙스터들은 돈을 버리며, 우리처럼 방해받지 않는 환경에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었던 나머지 사람들은 팝콘 한 통과 빨대 한 자루로 씹스터를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CGI가 우리의 상상력을 정복해버린 건 아닌가 싶다. 바바의 시대에는 그 누구도 모든 소품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끓인 옥수수 가루로 용암을 만들었다.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은 헤라클레스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들을 그려낼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는 진짜라고 믿을 만한 것들을 기대한다. 사실적인 특수효과에 대한 강조는 우리로 하여금 홀든 콜필드처럼 영화를 평가하도록 이끈다. 진짜냐 가짜냐? 우리는 성의 사실성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성 안의 캐릭터들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보다 많은 노력을 요하는 오래된 영화들은 곤경에 처하고 있다.

그나마 오페라 가수 윤기훈은 헤라클레스를 공연하는 동안 찾아올 낄낄거림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피가로 역을 맡은 적도 있는데, 이 250년 묵은 오페라에는 다음과 같은 선견지명 어린 대사가 나온다. “나는 울음이 나올까 두려워 서둘러 모든 것을 비웃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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