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도착했습니다. 어제 저녁과 오늘 밤, 내가 있는 곳이 이렇게 다르다니 좀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10일간 이탈리아를 돌아다녔는데요, 계속 숙소를 옮겨서 한 도시를 거점으로 움직였던 프랑스나 영국 여행보다는 힘드네요. 게다가 처음 이용해 보는 핀에어는 가격이 싸다는 장점 말고는 추천할 만한 이유를 잘 모르겠더라구요. 핀란드 사람들은 같은 유럽 사람들이어도 정말 다르게 생겼다는 인상은 확실히 받았습니다.  뭐랄까, 숲 속에서 나무를 베다가 나온 사람들 같은 느낌이랄까요.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소매치기를 당할 뻔도 하고, 참 여러가지 일을 겪었네요. 가장 인상에 남는 건 사춘기가 되어도 어리벙벙한 우리 아들이 베네치아에서 밀라노행 기차를 타자마자 덥다며 화장실에서 옷을 벗다가 옆에 둔 목지갑을 창틀과 창문 사이의 틈에 빠뜨려 버린 일이네요. 다른 때 같으면 몇 번 호통 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지갑 안에 50유로가 들어 있었단 말이죠. 바로 전날 저녁 베네치아 식당에서 바가지를 써서 100유로나 썼던 터라(한 접시에 8 유로가 아니라 그램 당 8 유로라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는데 알고도 당했어요) 1유로도 아까운 판이어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혼 나고 역무원 잡고 사정 설명하고, 제가 나서서 사정 설명하고 해서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한 후 기술자들이 와서 화장실 창틀을 다 뜯어내고서야 지갑을 간신히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 철도 서비스에 대해서는 절대 불만을 가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감동 받았습니다. 제가 사정을 설명했던 여자 역무원이 기차가 밀라노 역에 도착했을 때 다시 우리에게 와서 상황을 살펴보고 인부들이 아직 안 온 것을 알자 전화로 부르고 올 때까지 기다려 주더라구요. 아는 이탈리아 말이 '그라치에'밖에 없어서 그 말만 연발했네요.


  가장 좋았던 곳은 아씨시와 베르가모인 것 같습니다. 명색이 카톨릭 신자이면서도 여행 전까지 유명한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커녕 성 프란체스코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남편이, 막상 전경을 보더니 완전 아씨시에 반해서 하루만 묵고 가는 걸 너무 아쉬워하더군요. 마침 부활절 당일에 아씨시에 있었기 때문에 미사도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상혼에 물든 곳이라는 기분도 들었지만, 아씨시의 풍경을 보며 기분이 평화로워지지 않기는 힘든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가 오후 7시라 그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베르가모는 정말 의외의 수확이었습니다. 사실, 전 좀 기대가 되긴 했어요. 가기 전에 공부를 좀 했거든요. 그래서 남편에게 당신이 참 좋아할 것 같은 도시라고 말해 주었지만, 남편은 여행 전에 부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차서 집안 분위기를 어둡게만 만들며 제 이야기 따윈 귀도 기울이지 않으며 피곤해서 못 갈 거라고 잘라 말했었죠.(막간을 이용해 남편 흉...) 그러더니 막상 베르가모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혹시 이탈리아에서 살게 된다면 이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마음에 들어하더라구요. 뿌듯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습니다. 베르가모는 참 좋습니다. 구 도심, 치타 알타에 있는 성당 2개는 규모는 작지만 안은 정말 화려해요. 성당이라기보다는 궁전 같아요.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파이프 오르간 주자가 연습을 하고 있어서 더 분위기가 있었어요. 중세 도시다운 돌바닥이 이어지는 골목길과 예쁘고 작은 가게들, 그리고 물건들도 싸구요, 관광객으로 뒤덮이지도 않았어요. 풍경도 예쁘고, 역사도 길고(롬바르디아 공국의 주도였습니다), 한번쯤 가 볼만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좋았던 곳은 피렌체인 것 같아요. 피렌체는 설명이 필요없죠. 다음에 다시 간다면 피렌체에 더 오래 머물면서 근교도 천천히 보고 싶었습니다. 가장 실망스러운 곳은 베네치아였는데요, 도시 전체가 상업에 물든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든 게 너무 비싸고 바가지가 가득 한 것 같았어요.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힘든 건 날씨였습니다.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지인의 따끈따끈한 정보를 믿고 가죽 잠바랑 하늘거리는 티셔츠 정도만 가지고 갔습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그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햇살은 너무 강해서 선글라스를 끼지 않고는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니 너무 추운 겁니다. 결국 조금씩 조금씩 옷을 사기 시작하다가 결국 아들한테는 패딩을, 저는 스웨터를 하나 샀죠. 남부 투어 때 포지타노에서 살레르노로 가는 배를 탔다가 죽는 줄 알았거든요. 아씨시와 피렌체가 절정이었습니다. 아씨시에서 비가 왔는데, 비가 온 후 부활절날 바람이 부는데, 그런 칼바람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초겨울이었어요. 게다가 아씨시는 지대가 높아 더 추웠구요. 그런데 남편은 셔츠에 봄잠바고, 저는 셔츠에 가죽 잠바였으니... 남편이 아무리 아쉬워해도 도저히 추워서 걸어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피렌체에서는 아예 옷을 몽땅 다 꺼내서 입어버렸습니다. 스타일이고 뭐고 도대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진 속에 제 모습은 전부 다 같은 옷을 입고 있어요. 흑. 그러다가 오히려 북부로 올수록 날씨가 풀리더군요. 이 계절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정말 4계절 옷, 특히 패딩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은 피렌체에 와서는 완전 거지꼴이었어요. 지금 더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보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건조한 날씨에 햇볕, 바람, 3종 세트를 갑자기 맞으니 전부 피부가 트고 갈라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사춘기 여드름이 가득한 아들은 입 주변이 트고 각질이 일어난 가운데 여드름까지 가득해서 정말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피렌체에서 눈물을 머금고 그 비싸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의 고보습 제품을 사서 발라주었습니다. 그것도 잠깐의 효과였을 뿐, 얼굴 각질을 깨끗하게 제거하고서야 좀 괜찮아지더라구요. 피부 미용의 시작은 클렌징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의외의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의외였던 건 이탈리아에 미국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로마에서부터 관광지마다 미국 수학 여행단과 미국 사람들이 넘치더군요. 영어가 좀 들린다 싶으면 미국 영어였어요. 몇 년동안 영국 영어만 들으면서 살았던 터라 처음엔 신선하고 반가웠는데, 나중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좀 성가신 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 이탈리아 사람, 핀란드 사람의 외모가 어떻게 틀린지 알게 되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예전에 '서양 사람'이라고 하면 다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다를 수도 있다니 참 재미있더라구요.


  마지막으로 음식 이야기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요, 전 간신히 노력을 해서 떠나기 전에 비해 아주 약간만 체중이 불어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에 살면 당장 살찔 거예요. 워낙이 빵순이인데다가 제가 좋아하는 젤라또 천국이니까요. 생각보다 젤라또 맛이 특별히 좋다고 느끼진 못했지만(프랑스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었던 것 같아요), 당당하게 매일 '오늘도 젤라또 먹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 좋았어요. 여기서 매일 그렇게 말하면 살 찐다고 한 소리 듣겠지만, 이탈리아니까 정당한 이유가 되잖아요. 그리고 아씨시에서 먹었던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는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파스타를 보면 마음까지 따뜻하고 풍성해지는 것 같았어요. 부활절 십자가 빵도 제 구미에 딱 맞게 달달하더라구요. 매일 잘 뜯어먹었어요.


  여행에서 돌아와 기념품들을 이것저것 풀어놓다 보니 여행을 거듭할수록 사 오는 기념품 갯수가 늘어나는 걸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배고픈 배낭 여행자 시절에는 엽서 한 장으로 만족했는데, 이제는 과감히 옷도 사게 되었네요.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베르가모 벼룩 시장에서 산 멋진 색깔을 식탁보입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즐거워해서 좋았어요. 언제나 그렇듯 혼자서 여행을 다 짜고, 가기 전에 많이 싸우고, 가서도 또 싸우고 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정말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말해 준다는 건 제 수고를 알아 준다는 의미니까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시차 문제 없이 잘 잠들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다들 평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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