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6 17:56
지금 읽은 시 두 편
(요즘 시도 때도 없이 호출당하는 이 시인은 올가을 제 영혼의 동반자)
감정 노동
박정대
오늘은 감정을 노동하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집의 외벽들이 젖어가는데 나는 배고픈 짐승처럼 집의 내장에 웅크리고 앉아 무한의 바람결을 뒤적이며 한 움큼의 슬픔을 노동하였다
세계의 뒷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코끼리 군은 흡혈귀가 쫒아온다고 마늘을 사러 가는 중이었고 상강의 도린 곁에서 만난 가엾은 모기 양은 사막화된 피부의 건천을 따라 유목민처럼 떠돌았다
감정은 그때마다 빗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지만 마음의 습지에 다시 한 모금의 물을 부으며 나는 새로 돋아나는 내면의 지도와 영토를 오래도록 생각하였다
침묵은 코끼리 군이 지나간 발자국마다 고이던 물웅덩이
고독은 모기 양이 점령한 곳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던 한 점의 영토
오늘은 창문을 열고 하루 종일 감정을 노동하였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시선의 어깨에 외투처럼 걸친 채 온종일 담배 연기로 유령하였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담배 연기 속 소립자들은 머나먼 행성에 착륙한 우주선처럼 새로운 감정의 지도와 영토를 보여주었다
武川
박정대
그곳은 오랑캐들이 사는 나라
두 개의 달과 천 개의 별이 뜨고
단 하나의 심장을 지닌 바람이 부는 곳
우리는 하나의 태양이 질 때까지 술을 따르고
천 개의 태양이 다시 뜰 때까지 술을 마시지
생은 우리들의 취미
취미가 아름다워질 때까지
우리는 술잔에 삶을 따른다
술잔에 담긴 삶을 마신다
사랑은 우리의 습관
노동은 우리의 사랑
우리는 습관처럼 사랑하고 사랑만을 노동한다
그곳은 영혼의 동지들이 모이는 곳
2015.11.16 18:04
2015.11.16 18:23
가끔영화 님께 노래 한 곡~
Leonard Cohen - A Thousand Kisses Deep
혁명적 인간
박정대
눈이 내릴 듯 날이 흐리다 어제는 밤새 술을 마시고 푸른 눈의 늑대를 기다리며 그대와 함께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랑의 열망과 고통이 무엇인지 이제 나는 안다 눈이 내릴 듯 날이 흐리고 뭇별들은 잠시 잠이 들었다
고요가 친밀히 전하는 생의 루트,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밤새 눈이 내리고 눈 위로 내리는 눈은 고요하고 푸르다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노래를 듣는 날에는 커피나무에게로 간다
커피나무는 달리는 태양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 우두커니 서 있는 달
레너드 코헨의 천 번의 키스를 듣는 새벽에는 담배를 피우며 눈 내리는 국도를 달려가 커피나무에게 담배 연기의 음악을 들려준다
사랑은 눈 내리는 밤 구름의 키스 나무와 바람의 포옹 그대와 나의 아주 오래된 움직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창문을 열고 세상의 공기를 가져와 성분을 분석하며 오늘의 운세를 읽는다
오늘은 먼 바다에서 바람이 심하고 풍랑이 일겠으니 하루 종일 종려나무 흔들리겠다
비자나무와 삼나무 숲의 동물들은 외출을 삼가고 따뜻한 동굴 속에서 사랑을 이루어야겠다
나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해안 도로나 달려야겠다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내리는 눈이나 바라봐야겠다
추리닝 차림으로 낮술을 마시며 먼 곳으로부터 내리는 눈발이나 헤아려야겠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담배를 다 피우면 하루가 저문다
촛불을 켜고 내리는 눈송이들을 하나둘 녹이며 나는 생각한다
내 몸에 돋아나는 어두운 부분들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어두운 새벽 나는 왜 혁명적 인간이 되었나?
고요가 친밀히 전하는 생의 루트,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밤새 눈이 내리고 눈 위로 내리는 눈은 고요하고 푸르다
Screamin' Jay Hawkins - I Put a Spell on You
2015.11.16 18:48
로드 맥퀸과 레너드 코헨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네요 이런.
레너드 코헨의 수잔 좋아합니다.
아아, 로드 맥퀸 올해 타계하셨군요 명복을 빕니다.
맥퀸 자신의 노래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2015.11.16 19:00
앗, 가끔영화 님과 저는 가끔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다니까요. ^^
구름 가득한 하늘이 뻥~ 뚫릴 수 있는 노래 두 곡~
Screamin' Jay Hawkins - Maybe
Screamin' Jay Hawkins - I'm Lonely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박정대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사랑은 멀리서 젖고
나무들은 선 채로 외투를 털고 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구름의 휘파람 소리,
러시아 혁명사처럼 흐르던 한 떼의 구름이
허공에 인생 사용법을 쓰고 있다
계명을 몰라도
나는 휘파람을 불며
멀리서 젖고 있는 그대에게
허밍의 세계사를 전해본다
그대의 머리카락이 떠받치고 있던 허공에서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견고함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두툼한 외투
외투 끝으로
손을 내밀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으면
세상의 한끝이 내 손 위로 내려와
차갑고도 부드럽게 녹는다
나는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바라본다, 누운
물
사랑은 멀리에서 이렇게 나에게로 당도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2015.11.16 19:10
나에 내려 녹는 눈이 나의 완전한 사랑이었네요.
2015.11.16 19:39
가끔영화 님은 눈 내리는 격렬비열도에서 아무르 기타를 메고 사랑을 노래하는
눈먼 무사 박정대 시인과 감성이 통할 것 같아요. ^^
Screamin' Jay Hawkins - Heart Attack & Vine
당나귀 여린 발자국으로 걸어간 흙밤
박정대
내 고독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사랑이 왔네
사랑은 고통처럼 깊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봄밤은 좀처럼 마당가에 있는 꽃봉오리에게로 가지 못하네
나는 습관처럼 또 담배를 피워 물고 지금 다시 사랑은 치명적으로 덜컹거리네, 밤마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묻기 위해 가수들은 밤새 파두를 부르지만 나는 밤의 부둣가에서 그대에게 밀항하기 위하여 내 상처를 두들겨 木船 한 척 맹그네
나의 목선이 밤새 저 검푸른 파도를 헤쳐나가면 끝내 그대 눈동자의 새벽에 닿을 수 있을까
정박할 수 있을까
밤이 아파하는 곳으로부터 地上의 상처 같은 초저녁별들 떠오르고
그대가 아파하는 곳으로부터 나는 또 비 내리고 눈 내리네
파두 듣는 밤, 비에 젖고 눈에 묻힌 봄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비 내리다 눈 내리다 지쳐 이제는 파두, 파두, 파두, 소리치며 나에게로 쏟아져오는 고독의 흙밤
밤하늘엔 여전히 아물지 못한 별빛들 당나귀 여린 발자국처럼 빛나는데 강을 건너 사막을 지나 내 영혼의 天體와 심장의 천막을 펄럭이게 하며, 독감 같은 사랑이 왔네
내 사랑의 大地 위로 인플루엔자 같은 고독이 찾아왔네
2015.11.16 22:17
박정대 시인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살아있음의 환희일까요.
2015.11.16 23:17
갑자기 왜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하고 그러세요. ^^
본문의 두 번째 시에 따르면 박정대 시인에게 사랑은 습관이고 그가 하는 유일한 노동이죠.
맨날 아무르 강가에서 아무르 기타를 치며 아무르, 아무르 하고 노래하는 드문 시인이라고 할까. ^^
Lou Reed - Perfect Day
눈먼 무사
박정대
눈멀어 나 이제사 고향에 돌아왔네
아픈 몸 좀 눕히고 잃어버린 풍경의 시력 회복하러 시골에 있는 누님 댁에 내려와 며칠을 골방에서 뒹구네
그러나 고향은 고향이되 더 이상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이제 나 몸도 마음도 쉽게 쉬지를 못하네
시골 농협에서 나누어준 달력을 치어다보며 가까스로 일주일을 버티네, 내가 살았던 옛 마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농협 달력,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자전거를 타고 달력 속으로 난 길을 달리네
내려올 때 가져온 백석과 이용악의 시집, 가끔은 또 그 낡은 너와집에 들어가 서너 시간 아무 말 없이 뒹굴기도 하네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싸아하게 두드리고 가는 거, 그게 음악이지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거, 그게 바로 시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 가슴에서 포르릉 날아간 멧새들의 소리 다시 들려오기도 했네, 명치끝에서 고드름처럼 다시 자라나기도 했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시골 골방에 누워 있다가 봉창 여는 재미 아시는지
내 안의 날숨과 들숨이 세상을 향해 뚫어놓은 작은 통로, 맑고 차가운 숨결들이 누 떼처럼 넘나드는 저 벅찬 통로, 날것들이 생생하게 드나드는 저 生의 경계선
(니북에서는 방송 채널을 통로라고 한다지?
형광등 꼬마 전구를 씨불알이라고 한다지?)
씨불알 저게 바로 生이지, 시골에 내려와 어느 방송 통로에선가 아프리카 누 떼가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네, 거친 물살을 가로지르는 저 필사적인 生의 이동, 그게 바로 음악이고 귀향이지
生은 두 눈 부릅뜨고 귀향하는 것
아니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것
고향에 내려와 바람의 음악 소리 들으며 나 조금씩 고향을 회복하네
눈 쌓인 산과 벌판이 나에겐 그 어떤 진통제보다도 강력한 위안
눈멀어 내려온 고향에서 눈감으면 이제사 조금씩 복사꽃 핀 마을 보이네
복사꽃 사이로 날아다니던 호랑이들. 그 옛날의 무사들 보이네
노래보다 먼저, 시보다 먼저 본질적인 사랑이 눈을 밝게 하네, 그러한 곳에 이제사 나 눈감고 가까스로 당도한 것인데
사랑보다 먼저 사랑에 눈먼 나보다 먼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 깊은 밤 봉창문을 통해 은은한 숨결을 보내오는 그녀
달빛만 저 홀로 휘영청 밝은 밤
그러나 여전히 눈감고 골똘히 귀향하고 있는 눈먼 무사, 반가사유로 아득히 깊어가는, 눈이라도 펑펑 내릴 것 같은 칠흑의 밤
2015.11.16 23:08
두 분 덕분에 연근 조리고 깻잎찜하면서 좋은 음악 잘 들었어요.
세상에나, 목소리 좋은 사람도 참 많아요. 종종 잊고 있었네요.
ㅋ 끈적하고 덜쩍한 밑반찬들이 되었을거 같네욥^^
2015.11.16 23:27
jake 님의 요리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
그래서 한 곡 더~
Tim Buckley - Song to the Siren
그녀에서 영원까지
박정대
생의 불꽃이 환하게 타오르던 밤이었을 것이다
푸얼 푸얼 찻물이 끓어오르던 밤이었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상으로 자꾸만 하강하던 밤이었을 것이다
나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그녀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베를린의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아니 생의 어느 고요한 밤이었을 것이다
무대 한구석에 기타를 세워두고 담배를 피워 물어도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을 것이다
그녀가 왜 나를 바라보는지 왜 아무 말도 없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담배를 끄고 다시 기타를 연주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나는 영원에서 지상으로 하강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펼쳐놓은 침묵의 악보를 넘기다가 나는 문득 계절을 느끼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의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녀에서 영원까지 내가 걸어가던 생의 어느 고요한 밤이었을 것이다
생이 불꽃의 날개를 달고 환하게 타오르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푸얼 푸얼 끓어오르던 찻물이 생의 비등점을 향해 가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상으로 하강해 음악을 연주하고 나는 자꾸만 담배를 피우며 천사들을 만들어내던 그런 밤이었을 것이다
2015.11.16 23:42
시는 정말... 가슴에 와닿는 시점이 아니면 외면하게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억지로라도 자꾸 읽다보면 와닿는 딱 그 시점과 맞닥뜨리려나요
2015.11.16 23:57
박정대 시인의 시는 무협지 속의 사랑 얘기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재밌는 것 같아요. ^^
영화로 치면 <동사서독>이나 <닥터 지바고>의 분위기라고 할까.
저는 엊그제까지도 별 느낌 없이 읽었던 시가 오늘 비가 올 때 읽으니 갑자기 좋더라고요. ^^
Nick Cave - Wonderful Life
내 청춘이 지나가네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2015.11.19 00:47
Viktor Tsoi - Quiet Night
나의 플럭서스
박정대
달력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서른한 개의 날들, 가끔은 서른 더 가끔은 스물아홉 스물여덟
나의 한 달은 게으른 침대에서의 영원, 나의 한 계절은 침대에 누워 꿈꾸는 한 세상
창문 밖으로 세상의 바람이 불었다. 구름들은 점진적으로 이동하고 나는 그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에서 꿈꾸었다
낯선 공항과 낯선 공기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삶
삶은 유동적인 것 끊임없이 출렁거려야 삶인 것
꿈꾸는 자들의 달력은 어느 해안가 해당화 속에서 피어나고 있나
구름 위를 지나본 사람들은 안다, 천국과 지상이 구름의 장막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구름 위를 지나 당도한 또 다른 행성에서의 삶,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라는 직업의 숭고함을 안다
그대는 그대가 꿈꾸는 삶을 선택했는가 삶에 의해 선택되었는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척이는 세계의 모습, 그대와 나는 세계에 관여한다 삶이라는 직업으로
그대가 꿈꿀 때마다 불어오는 세계의 숨결, 그대와 나는 세계의 가장 충분한 심장이다 삶이라는 직업을 그만둘 때까지
그대의 왼손을 나의 오른손이 잡고 걷고 있다
그대와 내가 이 세계를 걷고 있다
그것이 삶이다
플럭서스 플럭서스 움직이는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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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는 찾지 않을 때 찾아오는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