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보다 긴 하루> 후기

2016.08.06 13:04

underground 조회 수:1550

지난 주에 읽으려고 했던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를 며칠 전에 다 읽었어요. 


제가 책을 그렇게 느리게 읽는 편이 아닌데 이 소설은 이상하게 아주 천천히 읽히더군요. 


50페이지 정도 읽고 나서 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예지게이가 마음에 들었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결코 이 책을 빨리 읽을 수는 없으리라는 것도 알았어요. 


작가의 생각을 풀어놓은 글은 휙휙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글은 그리 쉽게 빨리 읽어 나갈 수가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 어쩔 수가 없다, 이건 느리게 읽는 수밖에... 체념하고 느릿느릿 읽었어요. ^^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요약하기는 참 어렵네요. 별로 요약하고 싶지도 않고... ^^ 


이 소설은 주인공 예지게이가 까잔갑이라는 지인의 죽음을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나요. 


그 시간은 사실상 하루 정도였겠지만 예지게이의 까잔갑에 대한 기억, 친구인 아부딸리쁘와 사랑했던 여인 자리빠에 대한 기억 등을 


통해 예지게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주욱 훑어내듯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제목이 <백년보다 긴 하루>인가 봐요. 


장편소설을 읽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작가의 역량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흐트러짐 없이, 독자를 끌고 나가는 힘을 잃지 않는 소설이었어요.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무 이질감 없이 설득되는 걸 보며 신기했고요. 


소설의 중간 중간에 나오는 아름답고 슬픈 전설들이 이 소설의 내용과 맞물리면서 제 마음 속의 뭔가를 울리곤 했어요.   


주인공의 친구 아부딸리쁘가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부분에서는 저도 제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자신이 살아온 삶조차 제대로 기억하기는 참 힘든 것 같거든요. 열심히 쌓아온 지식과 지혜도 머리 속에 계속 남아있지는 않는 것 같고요. 


혼자 머리 속에 쌓아 놓았다가 세월 속에서 슬그머니 휘발되어 버리는 지식, 다른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지식은 


혼자서 즐긴 쾌락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나이가 한참 들고난 이제서야 왜 학자는 논문을 써야 하고, 왜 작가는 책을 써야 하고, 왜 가수는 음반을 내야 하는지 수긍하게 돼요. 


사람의 지식과 능력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를 않으니까요. 그때 쓰지 않으면 쓸 수가 없고 그때 만들지 않으면 만들 수가 없어요. 


부족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 두지 않으면 지금 내 머리 속에


있는 것들,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은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내 것을 흠 잡힐 일 없이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욕심보다는, 부족하지만 내 것을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디딤돌로 남겨두겠다는 겸손한 마음이 오히려 그런 기록을 쉽게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기도 해요. 


예지게이의 분신과도 같은 사나운 수컷 낙타 까라나르가 발정기에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지게이 자신도 사랑하는 자리빠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격정과 욕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그린 부분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특히 사랑하는


마음과 그 고통을 묘사하는 글에 약해서 그 부분에서 특히 집중하면서 재밌게 읽었어요. ^^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예의가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생각해 봐야겠어요. 


빨리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행간도 좁고 ^^) 거의 일주일에 걸쳐 조금씩 읽으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꾸준히 읽게 만드는 


재밌는 소설이었어요. 사실 이 소설을 읽기로 결정했을 때 호기심은 있었지만 별로 제 취향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나가는 동안 


오묘하게 제 취향인 부분들이 새록새록 드러나서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제 취향은 저보다 듀게분들이 더 잘 아시는 듯... ^^ 


지금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3분의 2쯤 읽었는데 이 소설은 쉽게 읽히긴 하는데 읽고 나면 뭘 읽었는지 멍~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만큼이나 독자인 저를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하는 소설이네요. ^^ 


이 소설은 다 읽은 후에 다시 짧게 후기를 올릴게요. 다음 독서 계획도 그때 생각해 보고요. 


(물론 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으신 세계문학소설이 있다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 


요즘 소소한 글을 계속 올리다 보니 독서 후기가 자꾸 뒤로 밀려서 오늘 듀게가 뜸한 틈에 얼른 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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