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늘은 흐리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집에서 썰렁한 오후를 경험해신 본 분들이라면 이윤기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의 분위기가 매우 일상적이란 걸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느릿한 분위기는 도입부의 그 롱테이크 장면에서의 일상적 대화를 시작으로 영화 내내 이어집니다. 남편과 아내 간에 무슨 문제가 있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도입부에서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고 싶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들 집에서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하고 남편은 그녀를 묵묵히 도와주고, 그런 동안 몇몇 일들이 일상 리듬 속에서 간간히 일어납니다. 제가 말한 것 외에 영화는 그리 많은 걸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갑갑하기도 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길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는 그 덤덤한 분위기를 비교적 잘 이끌어가는 가운데, 현빈과 임수정은 영화가 요구한 대로 조용하고 튀지 않게 호흡을 맞춥니다. (**1/2)

 

 

[컨트롤러]

예고편이 주는 인상과 상당히 다른 영화들을 우린 간간히 보곤 하는데, [컨트롤러]가 그러한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예고편만 보면 SF 스릴러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원작자인 필립 K. 딕의 편집증 세계와 한참 먼 판타지 로맨스이거든요. 주인공은 데이빗 노리스는 최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젊은 정치인인데, 그는 무용가 엘리즈 셀라스를 만나게 되고 둘은 첫 눈에 반하게 됩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인류 역사를 통제하고 관리해 왔던 ‘교정국’ 직원들이 둘은 평생을 같이 보낼 팔자가 아니란 이유로 그들을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데이빗은 엘리즈에게 향한 그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고, 당연히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가지요. 소재를 좀 더 재미있게 사용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지만, 적어도 판타지 로맨스로썬 맷 데이먼과 에밀리 블런트 간의 화학작용 덕분에 잘 먹히는 편입니다. 단지 절정에서 너무 힘을 주고 뻔한 결말이 그리 맘에 들지 않지만 일단 저는 간간히 웃으면서(교정국 직원들 참 재미있어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

P.S. 예, 다른 직원들과 함께 복고풍 의상을 입고 나오는 존 슬래터리를 보면서 TV 시리즈 [매드 맨]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지요.

 

 

[랭고]

애니메이션 영화 [랭고]는 신나는 잡탕 웨스턴입니다. 속 빈 강정이 꽉 찬 강정이 된다는 이야기는 픽사 수준까지 아니지만, 익숙한 장르 장면들이 이어지는 동안 뻔한 요소들을 재기와 활기 가득 넘치게 다루니 상당히 재미있더군요(특히 전 그 올빼미 4중주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월-E]처럼 본 영화는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를 자문으로 영입했고, 덕분에 가끔씩 실사 영화와의 간격이 사라지곤 합니다. 전반적으로 어른들이 애들보다 더 킬킬거리면서 볼 작품이지만 애들도 신나할 장면들도 여럿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본 영화는 3D로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 디지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걸핏하면 3D로 제작되는 요즘에 굳이 3D 없어도 재미 볼 것 다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작품이 있다는 게 참 반갑습니다. (***)

 

 

[월드 인베이전]

[월드 인베이전]은 SF로도 실격이고 액션 영화로써도 실격입니다. 일단 SF로써는 상상력이 빈곤하기 그지없습니다. 외계인들 우주선은 마치 은하계 폐차장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 조립한 것 같고(거기나 여기나 예산 부족 문제로 고생하는 겁니까?), 외계인들은 주인공들을 공격하기 위해 존재하는 CG 캐릭터들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만한 방어 기술도 있는데 물 뜨러 왔다면 차라리 대양 한 가운데에서 작업하지 왜 골치 아프게 해안 도시들에서 쓸데없는 깽판을 벌이는 겁니까? 뭐, 이런 걸 봐줄 수 있다 해도 영화는 액션 영화로써도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블랙 호크 다운]과 달리, 본 영화에서는 정신없는 편집과 카메라 움직임 속에서 우린 방향 감각을 잃고 이야기와 캐릭터 묘사는 빈약하기 그지없으니 현실감 따위는 날아가고 우린 주인공들이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참기 힘든 빈곤함 속에서 영화는 화면에서 계속 터트리고 쏴대기만 하는 동안 2년 전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의 그 기나긴 후반 1시간의 악몽 같은 추억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것만 바라고 8천원을 투자하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제 관점에서 볼 때 본 영화가 시간 낭비가 따로 없습니다. (*1/2)

 

 

[타이머]

[이터널 선샤인] 이후 SF적 소재를 시치미 뚝 떼고 현실 세계에 접목시키는 영화들이 간간히 등장하곤 했는데, [타이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영화 속 세상에서는 평생의 짝을 만날 수 있는 때를 예측해주는 타이머가 개발되는데, 이 장치를 손목에 못 박듯이 고정시키면 활성화되지요. 글쎄, 전 이 장치를 별로 믿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엄청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있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작동 방식을 보면 듀나님 지적대로 그런 경우를 방지하는 다른 기술도 그 세상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주인공 우나의 경우 문제의 상대방이 타이머를 안 사용해서 자신의 타이머가 작동 못하는데, 그러다가 만날 때를 놓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하여튼 간에, 영화는 우나가 앞으로 약 4달 후면 짝을 만날 젊은 음악가 마이키와 가까워지는 동안에 이 결점 있는 설정을 꽤 잘 밀고 가지만 결말에 가서 다루어야 할 문제를 엉성하게 다룹니다. 그래도 [컨트롤러]와 함께 나란히 봐도 괜찮은 작품이지만 말입니다. (**1/2)

 

 

[내 이름은 칸]

이 발리우드 영화 뒤에 좋은 의도가 있으니 아마도 본 영화를 좋아하실 분들은 어느 정도 있을 겁니다. 1) 국내 TV 드라마 저리가라 할 수준의 투박한 이야기 전개와 상황에 따라 덜컹거리는 닭살 돋는 캐릭터 묘사에 손발이 오글거리시지 않고 2) 매번 강조하기에 바쁜 과장된 멜로드라마틱한 음악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시고 3) 진심 어려 있지만 왠지 모르게 [레인 맨]에서의 더스틴 호프만 연기를 너무 공부한 티가 나는 주연 배우 샤룩 칸의 연기가 거슬리지 않고(아니요, 전 [레인 맨] 좋아합니다) 4) 발리우드 영화답게 2시간 35분 동안 잡다한 게 너무 많이 들어 있는 거에 지치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5) 개인적으로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다면, 막 국내 개봉한 본 영화를 보셔도 될 것입니다. 아, 그건 그렇고, 제 감상에 대해 짧게 말씀드리자만, 노골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루는 데 있어서의 서투름 때문에 상영 시간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저는 주인공만큼이나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

 

 

[세상의 모든 계절들]

마이크 리의 최신작 [세상의 모든 계절]은 한 부럽지 않을 수 없는 중년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웬만한 작가들이라면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방법을 궁리하겠지만, 톰과 제리(예, 그들도 자신들 이름들이 웃기다는 것 압니다)는 서로에 대한 이해로 잘 뭉쳐있는 금슬 좋은 부부이고 그들이나 그들 아들인 조는 직장에서나 인생에서나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들과 가까운 주위 사람들 몇몇은 그리 행복하지 않는데, 특히 하루하루가 힘겨운 그들 친구 메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마이크 리는 계절별로 챕터를 나누어서 그들의 일상을 관조하고, 우리 일상이 대개 그렇듯이 별다른 큰 일 없는 가운데 한 해가 지나갑니다. 리의 영화들에선 제작 초기 때부터 배우들이 감독과 가깝게 작업한 결과 좋은 연기들을 선사해 왔고 본 영화도 예외 아닙니다. 주연 격인 짐 브로드벤트와 루스 쉰도 자연스럽게 훌륭하지만 아쉽게도 오스카 후보에 오르지 못한 레슬리 맨빌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도 좋지요.(***1/2)

 

 

 

[카페 느와르]

한 소녀가 햄버거를 먹는 그 인상적인 도입부 롱테이크 장면을 시작으로 [카페 느와르]는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거리감이 드는 과정을 진행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백야]를 토대로 한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대칭적 줄거리 속에서 배우들을 책 읽는 듯한 연기 스타일로 몰아넣으면서 영화는 정유미에게 10분가량의 독백을 시키는 장면과 같은 기이한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듀나님 지적대로 수많은 각주들과 설명들과 변명들이 여기저기 끼어들어가고 쑤셔 넣어진 영화는 코미디이고 1부와 2부 사이의 막간 크레딧 장면에서 슬며시 낄낄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농담도 너무 길면 버겁지 않을지언정 지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러닝타임에 대한 변명도 있지요. (**1/2)

 

 

[굿모닝 에브리원]

[굿모닝 에브리원]는 간단히 평하자면 [브로드캐스트 뉴스]의 좀 더 가벼운 로맨틱 코메디 기성품 버전입니다. 우리의 여주인공 베키 풀러는 TV 아침 뉴스 쇼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승진을 꿈꾸는 젊은 프로듀서입니다. 최근 회사 내 감원 때문에 잘려 나가지만 다행히 그녀는 곧 뉴욕에 있는 다른 방송사에 취직하여 시청률이 저조해서 문제인 아침 뉴스 쇼의 프로듀서가 됩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그녀는 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공동 진행자를 자르고 대신 전설적인 뉴스 리포터인 (그리고 김정일, 앤젤라 랜스베리 다음으로 세상 최악의 인간이란) 마이크 폼로이를 영입하지만, 계약 상 이유로 출연을 강요받아서 자존심이 왕창 구겨진 폼로이가 그녀 말을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매일 아침 일찍 시청자들을 위해 바쁘게 돌아가는 방송사를 무대로 영화는 비교적 안전한 로맨틱 코미디를 하지만, 영화엔 장점들이 많습니다. 일단 레이첼 맥아담스는 매력을 풀풀 풍기는 가운데, 폼로이와 함께 쇼를 이끌어야 할 공동 진행자로써 다이앤 키튼은 오랜 만에 괜찮은 영화에서 코미디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해리슨 포드는 시치미 뚝 떼는 가운데 그의 무뚝뚝함을 코미디 재료로 잘 활용하지요. (***)

 

 

 

 [달빛 길어올리기]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인 본 영화에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이나 전통 한지 제조야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재들이긴 하지만, 정보 전달이 주목적인 다큐멘터리와 이야기 전달이 주목적인 극영화 사이에서 헤매다가 양쪽에서 모두 실패하니 꽤 실망스럽습니다. 영화의 드라마는 관객들에게 정보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뻣뻣해지거나 늘어지기 일쑤이고, 캐릭터 묘사도 빈약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니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큐멘터리적 부분은 아예 대놓고 끼어 들어와서 빈번하게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만 하고(영화 중 캐릭터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영화는 박물관 영상 자료로 돌변합니다), 다루는 소재들에 대해 그리 많은 걸 알려 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본 영화는 논산 훈련소에서 제 손발 오글거리게 만들었던 홍보 영화들보다 더 잘 만들어졌지만, 간과하기 힘든 그 어색함과 그에 따른 실패는 무시하기 힘듭니다. (**)

 

 

 [웨이백]

[웨이백]이 바탕을 둔 실화는 일단 상당히 극적으로 보입니다. 그 추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도까지 그 긴 거리(약 6500km)를 힘겹게 걸어와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정작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습니다. 시베리아 수용소 장면 이후로 주인공들은 화면 속에서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런 동안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추운 시베리아에서 바이칼 호수 근처 지역으로, 바이칼 호수에서 소련-몽고 국경으로, 소련-몽고 국경에서 뜨겁고 메마른 고비 사막으로, 그리고 고비 사막에서 중국 만리장성, 그리고 티베트, 그리고 히말리야 산맥, 그리고... 결말에서도 여전히 걷고 또 걷는다는 것 제가 언급했었나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에 참여한 작품답게 온갖 자연 풍경들이 큰 화면 속에서 연달아 장대하게 보여 지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은 참 작게 보입니다. 그나마 그것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좋은 분장 덕택에 에드 해리스나 시얼샤 로넌 등 인지도 높은 배우들 제외하고 대부분 구별하기 그리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1/2)

 

 

 

 [히어애프터]

영화가 다루는 소재에 대해서 냉소적일지라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충분한 정서적 몰입을 유도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피터 모건의 냉정하지만 동시에 온정적인 각본을 바탕으로 이스트우드 옹께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느긋하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캐릭터들을 살려냅니다. 사후 세계가 정말 있든 없는 간에, 영화 속 주인공들이 각각의 삶을 헤쳐 나가려는 모습에는 감동이 있고, 맷 데이먼를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조용하지만 효과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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