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플래시] 보고 왔습니다

2023.06.23 13:12

Sonny 조회 수: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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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앨런은 '플래시'라는 메타휴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베리 앨런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잡혀있고 그의 무죄를 증명할만한 증거는 변변치않다. 세상을 구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베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죄라는 걸 꼭 입증해야한다. 그는 과거에 가족이 함께 살던 집 앞에서 슬픔에 빠져 '플래시'로서 달리다가 과거로 갈 수 있다는 기묘한 현상에 맞닥트린다. 그는 살해당한 어머니와 무고를 뒤집어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내용만 따지면 [플래시]의 설정은 이미 관습적으로 되풀이되어왔던 것들이다. 시간여행과 평행세계는 이제 히어로장르에서 아예 빼놓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은 드라마판이나 과거에 개봉했던 동일 시리즈의 다른 배우를 평행세계의 일원으로 포섭하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으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팀 버튼 감독판의 배트맨이 등장하는 것도, 전혀 다른 새로운 슈퍼걸이 등장하는 것도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즉 설정의 참신함만으로 이 영화를 평가한다면 [플래시]는 크게 와닿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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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타 히어로물들에 비해 특별한 지점이 있다. 베리 앨런이 스피드 포스를 이용해 시간 여행을 처음으로 시도할 때, 영화는 시간여행을 말끔한 무엇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시간여행은 일그러지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형체조차도 유지할 수 없는, 기괴하고 징그러운 무엇이다. 어떤 면에서는 20세기의 공포영화를 떠올릴법한 이 연출을 보면서 나는 간만에 bizzarre 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베리 앨런이 원래의 시간대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괴물같은 존재가 베리를 습격해서 다른 시간선으로 밀쳐낸다. 베리 앨런의 시간여행은 알 수 없는 무엇이며 뭔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괴상한 세계, 즉 악몽의 세계가 된다.

이 영화는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를 공포로 다루고 있다. 판타지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불가해의 세계다. 처음에는 어둠이, 기독교 시대에는 신의 반대편에 있는 악마가, 혹은 자아 안에 있는 또다른 인격이, 그 다음에는 인간의 의식 아래에 숨겨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판타지로 발달되어왔다. 판타지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둠 속을 지나갈 때 인간은 빛이 차단된 시야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공포를 느낀다. 불가해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인간은 반드시 공포를 느낀다. 만일 영화가 판타지를 다룰 때 이 공포를 집어넣지 않는다면 판타지는 판타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단순히 자신이 모르거나 '신기한' 세상일 뿐 무언가를 깊이 알 필요가 없는 호기심과 낭만만 있는 세계가 과연 무슨 신비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나의 영화를 말하면서 다른 영화와 굳이 비교를 하고 싶지 않으나 [플래시]의 시간여행은 마블의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확연히 대조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시간여행을 어떻게 다루는가. 깔끔해보이는 슈트를 입고 이런 저런 실험 끝에 우스꽝스러운 실패를 경험한 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성공해내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어벤져스에게 시간여행은 어려울지언정 세계를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에 불과하다. 이 때 시간여행은 별로 신비로운 게 아니다. 과거의 인물들과 재회하는 기적은 일으킬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주무를 수 있는 과정이며 모두가 바라는 상상이기 때문이다. [플래시]의 시간여행은 어벤져스의 시간여행과는 꽤나 다르다. 그 표현방식부터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활용하는 방식까지, 그것은 예측과 통제가 통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 안에서 플래시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자기가 알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마주한다. 그것은 단지 이세계에 적응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인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의 여행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래시]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훨씬 더 흥미롭게 다룬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통제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예측이 어렵고 한명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내세우며 일반적인 히어물과는 다른 경로로 나아간다. 일찍이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부터 DCEU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모든 인물에게 불길한 앞날이 드리운 세계관을 질문했다. 슈퍼맨은 아주 강한 존재이고, 그 존재가 힘을 써서 적을 쓰러트리면 정말 끝인 것일까. [배트맨 대 슈퍼맨]은 슈퍼맨의 존재와 그 힘의 여파를 물었다. 비록 동명이인의 어머니를 뒀다는 이유로 모든 갈등을 퉁치고 넘어가려는데서 영화의 설득력이 크게 부숴지긴 했으나 DCEU는 초인이란 존재 자체를 질문해왔다.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인을 탐구하고자 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우정놀이로 변질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힘은 선한 것인가. 의도와 힘은 항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가. [플래시]에서도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초인이란 어떤 힘을 우연히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며 그 힘이란 소유자에게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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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는 그 힘을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겨놓는다. 영화 안에서 베리 앨런은 힘을 쓸 수는 있으되 그 힘을 완전히 다룰 수는 없으며 자칫하면 힘이 소유자를 잡아먹는다. 인간의 오만hubris를 큰 죄악으로 두고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덧없는 노력과 무한의 실패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그리스신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플래시]의 결론은 딱 하나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운명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영화는 헐리우드가 절대조건으로 내세우던 가족을 포기한다. 그리고 히어로다움도 포기한다. 이 영화에서 베리 앨런이 다다르는 결론은 자신의 무능이다. 어떤 사건 앞에서 자신은 해결사일 수 없으며 무력한 인간인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나름 파격적인 이 설정을 영화가 봉합하는 방식에는 조금 의문이 든다. 어떤 세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다고 다른 두 주인공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까. 타인과의 이별 또한 숙명이라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베리 앨런이 평행 세계에 가지는 책임감은 너무 붕떠있다. 배트맨이 왜 굳이 이 세계를 구하려하냐고 물어봤을 때 베리 앨런은 분명히 어머니가 살아있는 세계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즉 그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구해내야한다. 그러나 배트맨과 슈퍼걸의 패배를 그는 너무 빠르게 납득한다. 이별을 수긍하기 위해서 한 세계의 절멸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히려 평행세계 특유의 분리된 감각이 아닐까. 어차피 내 세계는 아니라는,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면 된다는 그 감각을 동원해야 베리 앨런의 깨달음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베리 앨런의 배움을 위해 기꺼이 한 세계를 희생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행세계의 새로운 영웅들은 덧없이 소모되고 만다. 배트맨과 슈퍼걸은 예정된 패배만을 경험하고 퇴장한다.

플래시 일행과 조드가 대적하는 클라이맥스에서 베리 앨런은 이 사건의 관찰자에 머무른다. '행동하는 자'가 아닌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서 베리 앨런은 다른 베리의 수많은 실패를 맛보고 그의 괴인화를 목격하며 세계로부터 동떨어진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동하는 자'를 만류하는 것 뿐이며 세계에는 직접 개입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수많은 평행세계를 등장시키며 베리 앨런을 절대적인 관찰자의 위치에 둔다. 그 결과 베리 앨런은 도덕적으로 "겸허함"이라는 교훈을 얻으나 '이 세계의, 누군가를 구해야한다'는 그의 소시민적인 책임감은 거시적인 운명론에 집어삼켜진다. 그래서 영화가 플래시란 히어로와 다른 초인들에게 전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른 건 다 해도 되지만 시간만은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3차원의 존재로서의 한계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혹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는 부활금지의 원칙일까. 이 부분에서 영화는 초인으로서의 한계와 능력에 대해 다소 모호한 입장을 견지한다. 슈퍼걸과 배트맨의 세계는 어떻게 되었으며 그 세계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영화는 두 베리 앨런의 싸움으로 뭉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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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플래시]는 신비에 대한 질문은 잘 던졌으나 그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까지는 끌어내지 못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이 시간의 마술을 제대로 다루는 것 자체가 상업영화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베리 앨런이라는 한 인간이 가진 이별의 고통을 마침내 납득하게 된다는 점에서, 드라마로서는 꽤나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인 에즈라 밀러가 그 아름다움을 스스로 다 날려버렸지만 말이다. 초인, 힘, 세계에 대한 이 질문을 계속 던져나갈 때 DCEU의 활로가 뚫릴 것 같다는 기대를 해보게 되지만, 그것은 리부트되는 다른 평행세계에서 확인해봐야 할 일이다.

@ 에즈라 밀러가 망친 이 영화의 흥행 결과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상기시킨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과오는 다른 세계에서도 기어이 원인 혹은 결과로서 자신을 쫓아오고 그것을 감당해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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