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열차를 놓쳐 다음 지하철을 탔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우리 동네 역에서 내리는데, 내리는 문 옆에 웬 여자 한 사람이 선다.

검고 짧은 단발머리의 정수리는 내 가슴팍까지 온다 ㅡ 160cm 남짓 할까. 얼핏 그녀의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온다. 경국지색으로 예쁜 것은 아니지만 단아한 모양새라고 느꼈다. 대략 20대 초반쯤에서 중반쯤 되었을까, 한 눈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감색 정장 재킷에 손가방을 들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눈매가 외꺼풀이었는지 쌍꺼풀이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너무 빤하게 쳐다보는 것이 예(禮)가 아닌 것 같아 더 시선을 두지 않고 피했다. 어쩌면 차라리 눈이 마주쳤을 때 싱긋 웃어주면 좋았을까 싶다. 아니, 그랬다면 이상한 변질자 취급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현대인은 하루에도 수만 명의 타인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잊어버릴 예정이었다.

플랫폼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와 에스컬레이터 앞에 줄을 섰다. 문득 고개를 드니 그 감색 정장재킷 허리 부분이 바로 눈 앞에 서 있다. 지하에 부는 열차풍을 타고 은은한 향이 코 끝을 스친다. 괜시리 시선 둘 데가 없어 맨 천장만 쳐다보고 올라오다 스텝이 꼬일 뻔했다. 개찰 게이트에 카드를 찍고 모퉁이를 돈다. 잦아든 이어폰 볼륨 사이로 또각거리는 소리가 뒤따라오는 것이 귀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새 낯설지 않게 된 은은한 향이 바람을 타고 출구 에스컬레이터 위쪽으로 불어올라왔다. 나는 애꿎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만 벅벅 긁었다.

지하철역에서 동네까지는 버스로 한 정거장을 더 간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는 계속 나를 뒤따라왔다. 남자라서,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신경은 쓰였다. 오히려 나를 무서워할까봐 돌아보지는 못했다. 막차 시간을 즈음한 시각, 각기 다른 곳으로 가는 버스가 두 대 왔다. 나는 아무거나 타도 상관없어서 나와 가까이 있는 것을 탔다. 버스카드를 찍고 적당한 곳에 있는 기둥에다 무사히 파지(把指)했다. 그런데 문득 내 턱 밑에 검은 정수리 하나가 동동 떠 있다. 아까 보았던 그녀다. 쌍가마였었구나. 

곧 내릴 것이라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댔다. 내가 삑 하니까 그치도 삑 한다. 은은한 민트 향이 계속 코끝을 살살 간질인다. 겨우 몇 분 남짓 나란히 서 있었던 것 같다. 신호등에 맞추어 각진 어깨선의 감색 재킷이 내 오른팔뚝을 몇 번 툭 툭 쳤다. 미안해하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나란히 정류장에 안착했다. 스텝이 또 꼬여 잠깐 휘청거렸다.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점멸했지만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줄곧 걸어갔다. 내가 사는 집으로 가는 방향도 그 쪽이다. 나는 이쯤에서 이 기이한 인연에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대낮같이 불을 밝혀 놓은 편의점 쇼윈도를 지나쳐 그녀는 마침내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밤을 지새며 마실 스포츠 음료 한 통을 트렌치코트 옆구리에 끼고 가게를 나섰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약간 아쉬워했다. 그러나 무엇을 안타까워했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어쩌면 잠을 자고 나서 내일 아침에 깨면 모두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이 몇십 분간의 동선의 겹침이 신기하여 적어놓는다. 단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렇다면 그대로 옷깃만 스친 인연은 얼마나 타인의 삶에 나라는 가치를 새겼을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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