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등학생이 된 조카가 있어요. 씩씩하고 똘망똘망하면서 에너지가 넘치며 순간순간 예민한 감성이 드러나는 어린이죠. 
몇 년 전부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고 서로 죽이 잘 맞는 편이라 조카와 저는 함께 자주 노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때로는 속으로 오, 이 녀석! 이란 마음이 될 때가 있죠.
서로를 늘 끔찍이 아끼는 조카와 언니, 형부 가족을 보며  조카 나이 즈음의 외로웠던 어린 날이 떠올라 다행스러움과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죠. 
언니가 부모로서 참 노력하고, 고민을 많이 하는구나 싶기도 했구요. 

아이를 키우는 집이다 보니 언니네 집에서는 가끔씩 소소한 해프닝이 발생하는데, 며칠 전 일어났던 일은 언니네 가족에게는 결코 소소한 해프닝이 아닌 사건이었죠. 
언니가 평소 조카에 대해서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었어요. 
조카는 평소 언니 부부나 저희 부모님, 그리고 저를 대할 때는 곧잘 애교를 부리고 귀여운 여우짓을 하며 여유있고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데
밖에 나가면 말투가 꽤 터프하게 변하고, 또래 친구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칫 차갑게 느껴질 말투와 표현을 쓰며 행동하곤 했죠.
그때마다 아이를 보며 왜 저런 차이가 나는 걸까 궁금해하고 신경이 쓰이던 언니는 몇 번 조카에게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때마다 조카는 "그냥.." 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답니다. 

어느 날, 밖에서의 말투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이 언뜻 조카를 보면 어딘가 차가운 성정의,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로 첫인상을 지니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언니는 
안 그래도 그동안 내심 신경쓰였던 부분이었기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카에게 넌지시 다시 한 번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답니다. 
아이는 대답하기를 좀 망설이며 머뭇머뭇하다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죠. 
"도도해 보이려고. "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다소 놀란 언니는 왜 도도해 보이고 싶은지 이유가 궁금하다고 다시 물었고,  
이에 조카는 다시 망설이다가 "그 이유는 나만의 비밀로 하고 싶어. "라고 말하며 대답을 거부했지만, 
이유가 궁금하다며 말해주기를 부탁하는 엄마의 모습에 맘이 약해져 이유를 털어놓았답니다. 

조카가 아이들에게 도도해 보이고 싶었던 이유는 녀석이 6살이었던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새로운 유치원에 중간과정부터 다니게 된 조카는 매일매일 아이들과 함께 놀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밝은 모습이었기에 새로운 유치원으로 보내기를 잘했다고 언니도 내심 흡족해 했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스스로 어렵게 털어놓은 것은 조카의 새로운 유치원 생활이 결코 순탄치 않았고 
아이가 혼자 많이 힘들어하고 잊기 힘든 상처를 받았다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실이었죠. 

해당 유치원에 이미 전부터 다니고 있던 아이들은 새로운 이방인이었던 조카에게 그닥 친절하지 않았고, 
유독 조카를 맘에 들지 않아했던 한 명이 주위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조카를 이른바 왕따로 만들기 위해 내내 심술궂은 행동들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당시 언니는 유치원 선생님들로부터 조카의 활동, 태도에 대한 칭찬을 많이 전해들었고 
조카도 별다른 내색 없이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조카가 수업 외 시간에는 아이들로부터 소외받았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죠. 
매일 오후마다 아이가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면 꼭 안아주며 사랑하는 내 딸 잘 다녀왔냐고, 오늘은 어땠냐고 물어보았고
그때마다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재잘대며 엄마와 그 날 배웠던 것에 대해 수다를 떨었으니 더더욱 그런 상상은 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조카가 밝은 표정으로 엄마와 나란히 걷기 바로 얼마 전까지도 아이는 자신에게 공공연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한 아이와 
그 아이의 패거리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였을 거예요. 
아이는 왕따라는 처음 겪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도도한 척'을 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거부당하는 것을 견뎌내려고 했을 거예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적들에게 증명하면서요. 
그렇게 지내다가 씩씩하고 적극적인 성격 덕에 왕따를 당하던 상황을 극복하며 하나, 둘 친구들을 만들어 나갔고
유치원에 다니게 된 몇 달 후에는 단짝친구라 부를 수 있는 친구도 한 명 생겼다고 해요. 

조카에게 단짝이 생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왕따만들기를 시도하던 아이가 어느 날 조카에게 다가와 내기를 제안했답니다. 
"너희는 둘이고, 우리들은 네 명이니까, 우리 어느 쪽이 더 친구를 많이 만드나 내기할래? 우리는 4명이나 되니까 우리가 이길걸!흥." 이라구요. 
조카는 당당하게 "난 그런 내기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구요. 
여하튼 조카는 후반에 가서는 친하게 어울려 지내는 아이들도 제법 생겼던 것 같아요. 
예전에 저랑 얘기할 때 유치원에서 누구랑 친하냐고 제가 물어봤는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아이들의 이름을 댔거든요. 
집에 놀러오는 아이도 몇 명 있었구요. 

오랜 망설임 끝에 2년 전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조카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언니에게 안겨 흐느껴 울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 정말 그때는,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어. 00이(당시 단짝친구)마저 없었으면 난 정말 너무너무 슬펐을 거야."라고 말했고,  
조금 진정된 후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을 때에도 유치원에서 겪었던 일을 학교에서도 또 겪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 학교 가는게 참 무서웠다고 털어놓았다고 해요.  
언니는 조카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비롯한 복잡한 감정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저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아이와 항상 소통하려고 애썼고, 서로 친밀감이 남달랐기에 아이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고 믿었는데 
정작 어린 아이가 그토록 혼자 고군분투하며 힘들어하던 날들을 자신은 까맣게 모르고 지나갔다는 것에 괴로웠을 테죠. 
조카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고백하는 엄마에게 유치원에서의 일을 숨겼던 까닭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엄마가 알게되면 엄마가 슬퍼할 것도 싫고, 엄마가 개입하면 일이 커져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도 덩달아 난처해질 것이 싫어서 말을 안 했다고 하네요. 

며칠 전, 언니가 엄마에게 간밤에 너무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는 이러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저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조카의 예민한 감수성과 섬세함에 오버랩되는 제 옛날 모습도 있었죠. 상처받고 싶지 않아 도도한 척을 한다는 것. 
혹시 너희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설령 나를 이유없이 싫어해도 나는 괜찮아, 나는 씩씩해, 나는 혼자서도 충분해. 라고 스스로 되뇌이는 것. 
어렸을 때 제가 겪었던 일들도 생각나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왕따라는 상황에 철저히 직면한 적은 없지만 낯선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어느 정도는 아니까요. 
그럴 때마다 제가 했던 행동도 조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난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아의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었어요. 
예전에 친구가 야마다 에이미의 '풍장의 교실'의 주인공의 잔망스러운 행동거지를 보며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랬을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크게 다르지는 않죠. 
저는 가족 속에서도 늘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는 것은 다르지만요. 
조카한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같은 엄마가 있고, 녀석의 표현을 빌면 까불이 아빠도 있으니 가족 속에서 도도한 척, 센 척 할 필요 없다는 게 다행이에요. 
어린 날, 안과 밖 그 어디에서도 맘편히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건 참 가혹하니까요.  

해프닝이 있은 다음날 아침에는 학교에 같이 등교하는 친구와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고 하네요.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면서도 손 잡는 것만은 꺼렸는데 말이죠. 
조카가 사람에게 상처받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상처 받더라도 굳이 도도하고 센 척 하지 않아도 이겨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강인함,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만큼 자신이 누군가를 상처줄 수 있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섬세함을 간직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제 조카라서가 아니라, 이 아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든단 말이죠. 훗.

얼마 전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귀신이니 드라큘라니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조카로부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듣고
맞장구치며 "사실, 그렇지. 인간처럼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어. " 라고 했을 때 끄덕이던 아이의 모습을 흘려 보냈는데
이 아이는 이미 인간의 잔인함을 겪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래도 주말에는 조카가 좋아하는 조개과자 마들렌을 구워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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