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어머니의 콩비지 찌개 - 마당에 가마솥 걸고 제대로 공들여 만든 음식 -을 맛있게 먹고 간만에 하룻밤 묵으며 힐링 중입니다.  
새벽에  눈뜨는 시간에 습관대로 일어나 거실로 내려갔더니, 어머니가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고 계시더군요.  로드리고 가르시아의 <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어머니 고백으론 너댓 번 이상 본 영화라고 해요.  으흠. 저는 이 영화를 완성도 높은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할 마음은 없지만,  두 번 이상 보게 만드는 영화는 좋은 영화다.' 라던 누군가의 주장에 동의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 좋은 영화입니다.  저도 오늘로 세 번째 몰입해 봤어요.
(처음 본 건 고딩 때인데, 통신시절 제가 가입했던 통신 영화동호회 유저 7할 정도는 '재미없는 영화'라는 평가를 내렸죠. 외로움의 내면을 심도 있게 조명하지 않고, 설명없이 그들을 카메라로 훑는 형식이라는 감상이 대세였어요. 저는 그 담담한 응시에서 오히려 풍부한 떨림의 파장을 전달받았는데, 밋밋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구나 갸우뚱했던 기억이. - -)

어느 영화에다 '문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욕이 될까요? '보기'의 수동성을 넘어 '읽기'의 능동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제게 문학적입니다. 공통의 주제와 분위기를 가진 각각의 단편들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장편으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집을 읽는 것 같아요.
실험시의 한 갈래인 '시네 포엠'이 영화 용어로 쓰이고 있을 만큼 시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영화들은 많습니다. 아니, 영화도 강렬한 영감과 창조성이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므로, 모든 영화가 시적인 장르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녀를...>은 시적으로 응축된  에피소드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소설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점이 특별합니다. 내용이 아니라 플롯 자체가 전달하는 깊은 인식이라는 게 있어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져 있는 여섯 여자의 이야기.
여주인공들은 유능하고, 아름답고, 독립적이고 그러나 외롭습니다. 그들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감옥을 짓고 들어앉은 채 세상으로부터 제각각 고립되어 있어요. 그들의 절망은 은밀합니다.  그럴듯한 커리어와  자신감도 그다지 큰 위안이 되지 않죠. 남의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화인처럼 이마에 새겨져 있는 '고독'을 문지르며 그들은 그 무엇인가를 기다립니다. 남자를? 아니, 외로움의 늪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줄 굳세고 따뜻한 손을.

삶이란 당사자인 '나'에게는 1인칭의 장편소설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나'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거죠. '나'의 운명이 '너'에게는 에피소드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를...>이 취하고 있는 에피소드 형식은, 삶이라는 공간의 객관적 리얼리티를 보여주기에 더없이 적합한  형식이에요. 영화든 소설이든, 에피소드 형식은 고립과 주체성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암시합니다. 이 영화처럼 다수의 주인공이 나오는 에피소드 형식에서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라는 의미가 플롯과 형식의 차원에서 이미 보장돼 있어요. 그만큼 에피소드 의식은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에피소드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조차 에피소드로 인식되는 순간이 있어요. 이 영화 속의 여자들은 바로 그 에피소드 자아와 에피소드를 넘어서는 자아 사이를 왕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조금씩 체득해가며 우리에게 보여주는 미세한 삶의 결들이 더없이 쓸쓸하고 애틋해요.

#  '여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둠 속에서 터널을 파는 '두더지'이다.' - 앨런 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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