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서너 번 밤샘근무를 합니다.  근로기준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회사이니 자율적인 야근인 셈이죠. 올해 들어 처음으로 날밤 새운 후 몇 시간 전에 퇴근했어요. 몸도 정신도 곤죽이지만, 눈부신 빛의 세상이라 잠들 수가 없네요. 
샤워하고 화분에 물주느라 집사의 눈으로 살펴보니 다육이(이름 모름) 한 종에서 꽃이 폈더군요. 삼 년째 키우고 있지만 다육이가 꽃을 피운다는 정보는 접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어요. 새끼손톱 만한 아이보리색 여섯장 꽃잎들을 화분 마다에서 발견하노라니 누군가 제 안에서 느릿한 어조로 중얼거리더군요.  '아, 미칠 것 같다...'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꿈을 꾸는 동안 제가 꿈 속인 걸 알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무연히 느끼게 될 법한 상태/ 시간/ 만남이었는데 왜 그런 탄식이 나온 걸까요. '아, 미칠 것 같다...'

다육이 꽃의 앙증맞은 자태를 대하는 순간,  외면해온 제 안의 우울이 돌발적으로 저를 제압해버려서 저는 사라질 지경이었습니다.  이상한 각성이었어요. 요즘의 나는 마치 아방가르드 공연 중인 배우였던 거구나 싶었습니다. 허공에서 그물에 매달린 채 출렁이다가, 서서히 기운을 소진한 뒤 석상처럼 정지해버리는 역할을 맡은 배우. 뒤이어 제 삶에 배치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형식에 대한 사랑, 빵집의 향기에 혹하는 아이의 허기진 삶은 살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도 따랐습니다.
'어떻게 지내?' 라고 누가 묻는다면,  ' 세상이 어수선해서 긴장하고는 있지만 견딜만 해. 업무가 과중해도 무사히 헤쳐나가고 있고...' 라고 답할 만한 나날입니다. 그런데도 제 안의 누군가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것을 느끼며 터져나오는 비명을 입틀막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라고 이성복 시인이 착잡하게 삶의 슬픔을 노래한 바 있죠.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것이 미칠 것만 같다고 누군가 제 안에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다른 세계의 동화 같은 다육이가 피운  비현실적인 작은 꽃을 난생처음 보는 순간에요.
우울은 불투명한 깊이죠.  우울은 어떤 언어도 통과하지 못하는 닫혀진 방- 모나드- 입니다.  우울은 섬뜩해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가 '나'인 것입니다. 우울이란 남들과 나눌 수 없는 것이므로 개인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個가 나눌 수(devide할 수) 없다는 뜻의 개인:individual 에도 들어 있죠.) 그런데 우울과 생경한 어느 아름다움이 만날 때, 제 안의 한 사람이 미칠 것만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분에 물을 주며 창밖을 보니 햇살만큼이나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는 풍경이네요. 퇴근길도 그랬습니다.  CO -19에  계속 주눅들어 있기에는 눈부신 봄날의 토요일이므로, 거리에는 빛의 텐트를 향해 이동하는 낙타들이 즐비했습니다.  어떤 낙타의 덩치는 너무 컸고, 어떤 낙타는 거만한 느림으로 제 앞을 계속 가로막았고, 어떤 낙타는 반복해서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제 신경을 긁었습니다. 
그런데 그 낙타들 속에 갇혀 있는 동안 저는 기이한  체험을 했어요.  제 뒤에서 한 낙타가 계속 비명을 질러대자, 다육이 꽃 앞에서는 '미칠 것 같다...'고 중얼거렸을 법한  제 안의 누군가가 큰소리로 이렇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라쓰미히 다쓰에쓰노흐 디 벨트 깁트! Lass mich, dass es noch die Welt gibt!)"

해석하자면 '날 놔두렴, 아직은 세상에 있도록!' 이라는 뜻이에요.  놀라웠던 건,  그게 소녀시절 처음 읽었던 릴케의 싯구라는 것도 기억났다는 거예요.  그동안 저 싯구를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볼 기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릴케의 시를 감각에 새겨놓았다는 것, 그것을 릴케풍의 싯구로 가장 잘 표현될 순간에 불러낼 감각이 제게 있었다는 것, 그건 하나의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릴케는 어떤 파토스의 바다에서 익사 직전의 저를 구출해 낸 셈이었어요.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저 다음에 이어지는 싯구는'Wenn Du nicht sie schon waerst 이미 당신이 그것이 아니라면!' 이네요.  릴케적인 맥락에서라면 이건 연애시겠군요. - -)

몇년 전 생일선물로 받은 후 일년 이상 손 안댔던 '로버츠 라디오'를 켰더니 그레고리안 성가와, 안젤로 브란두아르디와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흘러나왔습니다.  그런 맥락없는 음의 연결들을 들려주는 게  라디오의 매력이죠. 음악 프로가 선정한 선율을 들으며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이제 그 '미칠 것 같은'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저절로 지나갔다기 보다는 지나갔다고 마음먹은 것이라 하더라도. It's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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