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반의어, 이상

2020.05.16 06:10

Sonny 조회 수:1143

저는 현금보안업체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군필자 20대 남자들이 하기에는 정말 좋은 직업입니다. 되게 쉽거든요. 주로 하는 일은 몇천만원 가량의 지폐들을 가방에 넣고 차에서 ATM기에 채워넣으면서 안에 있는 돈은 다시 꺼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판기 음료수 채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경마장 같은 경우에는 지폐를 거의 몇억원씩 나릅니다. 워낙에 현금거래가 많은 곳이니까요. 그 때는 돈을 자루 같은 거에 담아서 구르마로 이동하는데 혹시라도 현금이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오우~~ 하는 소리도 냅니다. 일 하고 있는 저희를 눈 앞에 두고서도 "저 돈만 있으면!" 하면서 농담을 치는데 좀 거슬리기도 합니다. 이 일을 해봤다고 하면 100이면 99는 물어봅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나르면 좀 이상한 생각 들지 않아? 돈 갖고 튀어버릴까 하는?" 당연한 호기심입니다. 그렇게 많은 현금을 한꺼번에 실물로 옮길 일이 보통 사람들한테는 많이 없잖아요.


경험의 유무가 가져다주는 인식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현금운송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겠지만, 이 일을 해본 사람에게 지폐는 종이덩어리에 더 가깝습니다. 맨날 그렇게 돈을 채우고 꺼내고 세고 하는데 그게 무슨 실감이 나겠습니까. 돈을 계속 만지다보니까 손이 상해있을 정도입니다. 당연히도 일하고 받을 임금과, 입어야 하는 유니폼이 돈을 빼돌린다 어쩐다 하는 생각을 원천봉쇄시킵니다. 그리고 돈을 옮기는 과정이 워낙 꼼꼼해서 돈을 빼돌릴 수가 없습니다. 미리 산출되어있는 금액이 있습니다. 그 금액대로 돈을 넣어야 됩니다. 현금인출기니까 당연히 안에 저장된 액수의 돈이 있겠죠? 그러면 그만큼 돈을 또 빼야됩니다. 돈을 빼서 그만큼의 총액이 맞는지 확인을 합니다. 현장에 지폐계수기를 갖고 가는 경우도 있고 돈을 차에 일단 옮긴 다음 지폐개수기에서 돈을 셉니다. 돈을 옮기고 확인, 옮기고 확인, 옮기고 확인, 일이 다 끝난 후에는 본부에서 다시 총액을 다른 직원들이 전문적으로 확인합니다. 거기는 들어가면 돈냄새가 쎄게 납니다. 온통 동전과 지폐들이 쌓여있거든요. 확인이 실시간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 돈을 어떻게 한다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직원이 돈을 빼돌리지 말라고 2인 1조로 무조건 움직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누가 현금운송하면서 돈을 빼돌릴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할 겁니다. 나쁜 사람이 그런 범죄를 시도할 수는 있는데, 그걸 완전범죄에 가깝게 은폐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합니다. 뭘 모르는 사람이나 제기할만한 호기심인거죠.


재미있는 건, 그렇게 엄중하고 치밀한 시스템에서도 어떤 오류들은 생긴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주어진 돈이 전산에 기록된 돈보다 적은데, 전산에 입력된 대로 돈을 채워넣기는 해야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채울 돈을 적게 주는데 그 돈만큼 채워야 됩니다. 이런 상황이 꽤 반복적으로 생겨서 알바시절 제가 물어봤습니다. 그냥 일종의 재고부족이라는 겁니다. 회사도 그걸 알고 어떻게든 돌려막기를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돈은 적은데 어떤 ATM기에서 빼낸 돈으로 일단 숫자만 맞추는 식입니다. 그게 아니면 다른 팀한테 지원요청을 해서 현금을 지급받거나 본부에 연락해서 물량을 지원받습니다. 거액의 돈이 움직이는데 그게 전산상으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여기서 뺀 돈으로 저기 구멍을 메꾸고 하는 식의 주먹구구 형식으로 일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게 일상입니다. 무슨 조직적인 비리가 있는 게 아니라 물량 부족을 임시적으로 그렇게 채우는 겁니다. 채워야 할 기준치가 있고 그 기준치를 채우기에는 현실적으로 물량이 모자라고. 어떤 은행의 ATM은 돈이 되게 많이 빠지고 차고 하니까 물량이 많이 필요한반면, 어떤 편의점의 ATM은 물량이 거의 안빠지니까 돈을 땡겨올 수 있습니다. 저도 이걸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건, 전산에 짜맞춰진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고 얼추 숫자를 맞추는 형식으로 일이 돌아간다는 겁니다. 무려 보안업체에서!


모든 일이 칼같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게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현실적인 문제들은 "가라"로 처리됩니다. 제가 위에서 보안업체의 2인1조 운송 규칙을 설명드렸지만, 바쁠 때는 그게 안지켜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규칙은 말 그대로 이상적이고 현실은 그 규칙을 다 엄수하지 못해서 본질적인 것만 지켜지면 다른 규칙들은 생략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현실의 구멍을 메우고 기록들이 실재를 만들어낼 때도 있죠. 저는 행정병이었던 시절 각 병과의 시간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기록에는 항상 거창하게 무슨 분과, 무슨 주특기 훈련이라고 꼭 거창하게 적었습니다. 그 분과가 실제로 주특기 훈련을 한 적은 손에 꼽는데도요. 부대정비를 하거나 뻘스러운 잡일을 행정보급관과 하고 있었죠. 기록이 현장을 증명하지 않고 현장이 기록에 반드시 반영되지 않습니다. 한국군의 현실을 모르는 외국인이 들으면 기겁을 할 지도 모릅니다. 한국군은 매번 그렇게 기록조작을 하고 군대 훈련을 나태하게 하고 있나? 이것은 국방에 치명적인 흠이 되지 않나? 이상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만 군대를 체험한 사람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일입니다. 


진실의 반의어는 흔히들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현실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반댓말은 무엇일까요. 이상입니다. 그래서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진실을 재단하기 위해 진실을 이상과 동치시키고 현실을 거짓말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상에 닿지 못하는 현실을, 거짓말의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안업체에서 꽉 채워넣어야 할 현금을 그렇게 돌려서 막을 수 있지? 이건 엄연한 기만 아냐?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 군대에서, 나라 지키는 기초훈련을 문서작성으로 땡칠 수 있지? 그건 국방을 저해하는 안보위반 아냐? 이상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전에,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냥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그게 어떤 현상과 그 현상의 주체가 되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손쉬운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악인들이 교활한 꾀를 부려서 선량한 사람을 등쳐먹는 일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냥 시스템의 문제로 뭔가가 불완전하게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보안업체 직원들이 다들 킬킬대며 돈을 빼돌리려고 돌려막기를 하는 게 아니고, 군인들이 북한에 세뇌당한 사람들이라서 의도적으로 나태하거나 작업만 하고 있는 게 아니듯이요. 군필자 남자들이 현재 한국군대가 태만하고 서류중심이라고 해서 그걸 사람들의 사악하고 방심가득한 태도라고 보겠습니까? 최저임금도 안주고 사람을 굴려먹는 현실에서 어떤 이상들은 그렇게 미완의 형태로 흘러가는거죠.


그런 걸 있는 그대로 놔두자는 게 아닙니다. 어떤 현실에서 인간의 악의나 부정을 의도적으로 추출해서 악마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왜 보안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악마로 보지 않을까요. 왜 군인들을 베짱이 세금도둑으로 보지 않을까요. 이상을 다 실현하기 어려운 현실을 제가 직접 체험해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비한 현실 속에서도 안되는 이상을 이루려고 몸을 갈아넣고 현실의 톱니바퀴들을 여기저기 끼워맞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경험적 사실이 필요합니다. 그 경험적 사실들은 숫자로는 기록되지 않는 인간 자체에 내재되어있고 그 인간들을 조금이라도 체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걸 이해하는데 기록과 숫자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 제가 행정병으로 있던 부대의 기록들도 어떤 진실을 가리고 있을 겁니다.


조금 더 나아가봅시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의 의심을 해소할 수 있도록 너희가 필요한 조사를 받으면 되잖아? 말은 쉽죠. 군대에 있던 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봅시다. 군대에 감사나오면 그게 편하고 신나는 일인지. 행정병인 사람들은 다 압니다. 뭔가 대단한 비리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감사에 걸리지 않게 하기위해서 병사들이 날을 새고 문서 체크를 하고 일상 업무를 미뤄가면서 기록과 현실의 갭 차이를 확인하려고 온 신경을 다 씁니다. 그 감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노동이고 벌입니다. 당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검찰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으세요, 라고 말하면 누가 순순히 따를까요? 그것은 일단 인격적으로 모욕을 견디는 일이면서 자신의 일상과 직업을 포기한채 심적 소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입니다. 검찰이 누군가를 조지기 위해 수사를 하고 압수수색을 하는 이 현실에서, 그 징벌을 자처하라고 하는 건 너무 무례하고 뻔뻔한 소리입니다. (이미 현실이 되었지만요)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누군가를 조지고 싶어서 이상의 부재를 현실의 악덕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닌지. 어떤 이상은 현실에서 아둥바둥대는 누군가를 후려패는데 정말 편리한 도구가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상은 무지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의 손에 찰떡같이 쥐어진다는거죠. 존중을 제거해야만 풀스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현실을 존중하려는 사람들이 물음표를 가슴 속에 품습니다. 딱 보아하니 너는 악당이구나! 현실을 치워낸 사람들은 느낌표를 토해내고 곧바로 휘두릅니다. 이제 느낌표를 눕혀놓고 점들을 찍을 시간입니다. 경험적 진실이 일천한 자신의 한계를 인지합시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게 누가 잘못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잘못의 주어를 기어이 놓고자 할 때 그것이 의심이라는 폭력이 됩니다. 제가 말한 이 모든 현실과 이상의 간극은 그 현실에 놓인 주체들의 갈등이 존중받아야 마땅한 두 주체간에 벌어졌을 때 한정되는 일입니다. 어떤 일들은 그렇게 생겨나고 불필요하게 선과 악의 싸움으로 소비됩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본인의 입장에서 어느 한 쪽에 대한 진실의 준비가 좀 모자란 것은 아닌지 자가점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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