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을 봤어요. <라스트 미션>은 개인적으로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중 <그랜 토리노> 이후로 만든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였어요. 이 영화가 언뜻 보기에는 내용도 별 게 없고 만들기가 쉬워보이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영화는 정말 아무나 만들 수 없습니다. 과연 거장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렇게 쉬엄 쉬엄 영화를 만든 것처럼 가벼워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연하게 할 건 제대로 다 하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정말 힘들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그렇게 여유롭게 만들어진 작품이 일관된 작가적인 세계관과 스타일마저 유지하고 있다니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라스트 미션>은 <그랜 토리노>의 일종의 자매편 같은 느낌이 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두 작품 모두 주연을 맡고 있고 편협한 노인이 세상과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렇죠. 두 작품 다 노인의 지혜를 건네는 캐릭터 드라마이면서 범죄 스릴러적인 성격이 가미되어 있다는 공통점도 있어요.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을 가진 서부극의 영웅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물론 이건 과거에 서부극의 아이콘이었던 이스트우드의 이미지가 겹쳐지기에 가능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랜 토리노>와 가장 유사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라스트 미션>은 그밖에 이스트우드의 다른 영화들도 떠오르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극 중 딸과 아버지의 관계와 관련을 지어 본다면 <앱솔루트 파워>,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있고 일종의 로드 무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범인을 추적하는 자와 범인 사이의 미묘한 유대 관계를 고려해본다면 <퍼펙트 월드>도 떠오르는 측면이 있어요. 마약과 관련된 갱들에게 샌드위치를 권하는 장면에서는 <트루 크라임>이 떠오르더라구요. 이렇게 <라스트 미션>에는 이스트우드의 전작들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요소들이 있어요.

<라스트 미션>은 80대 마약 운반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요. 저는 이스트우드가 이런 이야기를 선택한 것 자체가 매우 훌륭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만약 주인공이 20대 마약 운반책이었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영화가 나왔을까요? 물론 20대가 주인공인 만큼 젊음의 활기가 넘치는 작품이 나왔겠지만 <라스트 미션>과 같은 특별함을 지니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마약 운반책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범죄 스릴러를 만든다고 가정할 때 그 주인공이 노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류의 범죄 스릴러와는 다른 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이스트우드가 바로 그 점을 노렸다고 봅니다. 일단 노인이 출연하는 만큼 자연스럽게 젊은이가 출연할 때보다 영화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느린 호흡을 가진 영화가 만들어지는 거죠. 천천히 걷는 노인에게 억지로 빨리 걸으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장르의 법칙이 무너지게 됩니다. 노인인 마약 운반책이 등장함으로써 장르의 의외성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스트 미션>이 스릴이 가득한 범죄 스릴러라기보다는 한 노인에 관한 사적인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을 감시하기 위해 도청 장치를 해놔도 별다른 소용이 없습니다. 감시하는 사람들이 듣게 되는 건 흘러간 팝송들이요. 그걸 여유롭게 따라부르는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목소리뿐이지요. 그리고 이 노인은 이미 다 살았다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두려운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유유자적합니다. 급하게 마약을 운반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죠. 중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모텔에서 젊은 여성들과 즐기면서 쉬어갑니다. 답답한 건 이제 얼을 감시하는 젊은 갱들입니다. 노인이 마약을 운반하기 때문에 노인과 젊은이들 사이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그릴 수 있게 되죠. 이런 류의 범죄 스릴러에서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를 당하는 사람이 사이좋게 샌드위치를 나눠먹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노인이 진심으로 인생에 대한 충고를 젊은 갱에게 해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부인이 위독하다고 갑자기 마약을 운반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에게 사과하면서 간병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해보면 장르적으로 허용되기가 힘든 이야기 전개라는 거죠. 범죄 스릴러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범죄 스릴러라 스스로 불리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진행되는 영화라는 겁니다. <라스트 미션>이 놀라운 이유는 노인을 마약 운반책으로 설정함으로써 전혀 다른 종류의 범죄 스릴러로 탈바꿈시켰다는 겁니다. 특별히 애써 장르를 파괴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스트우드는 그걸 범죄 스릴러에 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아주 쉽게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가족 멜로드라마에다가 로드 무비이기도 하고 장르도 유연하게 왔다갔다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장르를 성립시키는 데에는 특별히 관심도 없다는 듯이 영화가 보이는 순간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더 놀라운 이유는 이스트우드가 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라스트 미션>에서 작가적 스타일마저 일관되게 지켜낸다는 겁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어낸 일련의 장르 영화들이 놀라운 건 같은 부류의 장르 영화들과 비교해봤을 때 '느린' 영화라는 겁니다. 장르가 서부극이 됐건 전쟁영화가 됐건 멜로드라마가 됐건 스포츠물이 됐건 범죄 스릴러가 됐건 이스트우드의 장르 영화들은 느린 호흡으로 진행이 됩니다. 유장하다고 말을 하고 싶을 정도의 호흡을 갖고 있죠. 저는 이걸 장르에 성찰의 시간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성찰의 시간성은 이스트우드의 출연작일 경우에는 이스트우드의 육체가 가진 시간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젊은 시절 스타 아이콘이었던 이스트우드의 노쇠한 육체가 장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자체로 장르 속에 현실의 시간성이 기입되고 보통 이스트우드가 맡는 역할은 그가 젊은 시절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변형인 경우가 많으며 서사적으로는 그 캐릭터들을 도덕적으로 재검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스트우드의 출연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장르를 성찰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가 출연하지 않는 작품들까지 아울러서 생각해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성이라면 그것은 이스트우드의 장르 영화들이 다른 감독들의 동류의 장르 영화들에 비해 전개 속도가 느리므로 관객들이 극 중 인물들을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진다는 것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성찰의 시간성과 관련해서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영화 형식적으로 봤을 때도 여타의 장르 영화와 달라지는 지점이 있어요. 범죄 스릴러의 경우를 보자면 이스트우드의 범죄 스릴러에도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추적 과정이 전개되지만 이스트우드는 늘 그 추적 과정을 스릴있게 보여주는 데에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그 범죄와 관련된 공동체의 면면을 찬찬히 살핀다거나 그 범죄와 관련된 인물의 도덕적 선택에 대한 고뇌를 천천히 보여주는 데 치중합니다. 그럼으로써 범죄 스릴러이기는 하되 이스트우드 특유의 느린 호흡의 범죄 스릴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라스트 미션>은 이전에 이스트우드가 만들었던 느린 호흡의 범죄 스릴러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앞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 영화는 마약 운반책과 그 마약 운반책을 잡으려는 마약반의 추격전이 큰 줄기인데도 불구하고 이스트우드는 그러한 이야기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물론 이스트우드는 긴장감으로 충만한 스릴러를 만들 수 있는 연출적인 역량이 있는 감독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오히려 이 영화는 범죄 스릴러의 외양을 띤 가족 멜로드라마에 가깝지요. 서부극적인 인물이 등장하므로 변형된 웨스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렇게 장르적으로 유연한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건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스트우드가 장르에 대해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그만의 철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인 장 뤽 고다르는 '모든 영화는 다큐멘터리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 말에 비추어 보자면 <라스트 미션>은 한 노인에 관한 빼어난 영화이자 노인 이스트우드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노인은 젊은이들에게 노인의 지혜를 건네주고 도덕적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힙니다. <라스트 미션>은 공동체와 가족에 대한 회한을 갖고 있던 인물이 속죄하고자 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인공 얼은 웨스턴의 영웅을 닮아있어요. 이전의 이스트우드의 영화와 다르게 가족과 화해하고 영화가 끝나서 개인적으로 좀 당황스럽기는 했어요. 해피 엔딩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스트우드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 영화를 한번 더 보면서 엔딩에 대해 다시 고민해볼 생각이에요. 해외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별로라고 들었는데 저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네요. <라스트 미션>을 보시면서 거장의 경지란 어떤 것인지 많은 분들이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여유롭게 영화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지혜를 건넬 수 있는 영화는 정말 드물어요. 제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거장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이 앞으로 오래 오래 장수하셔서 30편 이상의 영화를 더 만드셨으면 좋겠다는 바램과 함께 추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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