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대화'

2019.10.28 05:54

어디로갈까 조회 수:790

듀게에 소개한 적 있는 다국적 정례모임으로 긴긴 일요일을 보냈습니다. 잠자고 일어난 지금까지도 머리엔 바람소리만 하염없고 마음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둑해서, 편집창을 열고 모처럼 장편일기를 썼어요. 몇 개의 단어로 골조를 세워두는 식의 메모만으로는 안 될 상념이 고여 있었거든요. 메모는 생각은 남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표현이 사라져버려요.
아무려나,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머리속에서 일렁거렸던 대화의 형식 또는 방법에 관한 비유들.

- 공중곡예로서의 대화.
두 사람이 각자의 포스트에 오릅니다. 그러고는 자기 몫의 밧줄을 잡고 각기 다른 편에서 몸을 던져 만남의 지점까지 날아 오죠. 
실수가 없다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게 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 자기의 포스트로 데려갑니다. (어제 대부분의 대화가 이 유형이었음.)

- 동행으로서의 대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느 거리만큼 함께 길을 갑니다.  둘은 자연스럽게 멀리 보이는 산이나 구름, 또는 아직 펼쳐지지 않았으나 기대되는 풍경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요. 그러는 동안 서로 국적이 다르고 살아온 이력이 다르고 살아갈 삶의 모양도 다를 거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순간 만큼은 풍경을 공유합니다. 

- 운전으로서의 대화.
길을 아는 사람이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의 차를 인도해 함께 간선도로로 들어섭니다. 인도하는 측에선 그 도로가 교차로가 없는 직진로이기 때문에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아요. 앞사람의 차만 보며 긴장해 있던 뒷사람도 어느 순간부터는 창 밖 풍경들을 음미하는 마음이 됩니다. 

- 침묵으로서의 대화.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각 뿐만 아니라 음각 또한 형태를 지니는 법이므로, 저와 상대는 둘의 어떤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준비의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읽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대화는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갈길을 가다 보면 마을이 나오고 광장이 나오고 골목이 나오고 골목끝이 나오고 바다가 나오고....... 무엇이든 나와요.
아름답거나 거대하거나 풍요로운 장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모든 장소는 기억할 만한 장소들인 거죠. 이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대화는 서로가 열리고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화에 뒤따르는 변화를 미리 계산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것도 잊지말 것!

덧: 초기 사춘기시절,  말하기 싫다고 했더니 울 할아버지가 토닥토닥 해주셨던 말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잘 듣기만 하거라. 니가 듣고 있다는 걸 상대는 알지.  그것도 충분한 대화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7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1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23
123703 듀나원기옥 - 뉴진스 새 음반 보고 옛 파워퍼프걸 노래 찾기 [5] 상수 2023.07.10 308
123702 시대별 가수 [7] catgotmy 2023.07.10 350
123701 마틴 스코세이지 신작 -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 메인 예고편 [6] 상수 2023.07.10 538
123700 뉴진스의 New Jeans와 슈퍼 샤이를 듣고 [6] Sonny 2023.07.09 1055
123699 애플TV는 자막조절이 안되네요 [4] 산호초2010 2023.07.09 358
123698 여름철, 하드 [3] 왜냐하면 2023.07.09 230
123697 [영화바낭] 듣보 B급 장르물 두 편, '테이크 나이트', '영혼의 사투'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07.09 266
123696 프레임드 #485 [6] Lunagazer 2023.07.09 89
123695 음바페 인터뷰로 시끄럽군요 daviddain 2023.07.09 439
123694 갓 오브 블랙필드 라인하르트012 2023.07.09 212
123693 [영화바낭] 기대 이상의 튼튼한 귀환(?), '이블 데드 라이즈' 잡담입니다 [10] 로이배티 2023.07.09 446
123692 챗봇한테 유인촌을 물어보니 [2] 가끔영화 2023.07.08 442
123691 NewJeans 뉴진스 Super Shy MV 상수 2023.07.08 187
123690 프레임드 #484 [2] Lunagazer 2023.07.08 107
123689 히트 (1995) catgotmy 2023.07.08 160
123688 미임파 보고.. 라인하르트012 2023.07.08 305
123687 미션 임파서블: 데드레코닝 파트 1 감상!(스포 약간!) [2] 상수 2023.07.08 402
123686 스마트폰 오래 쓰는 법 catgotmy 2023.07.08 265
123685 인자무적 [1] 돌도끼 2023.07.08 218
123684 넷플 추천 Wham! [8] theforce 2023.07.08 46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