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벽의 거의 모든 것

2019.03.22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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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를 들먹일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 들면서 저절로 되는 일들이 있더군요. 어떤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는 것.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들이 아니라 인간이 어떠한가를 조금은 알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파릇하던 시절엔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불같이 일던 노여움도 많이 잦아들었어요.

사제가 된 친구 S가 신의 은총을 체험한 다음부터 몸에서 장미향기를 맡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선명히 느낀다고 했고, 아름다운 사람의 기를 느낄 수 있다고도 했어요. 장미향기라니! 참 꿈같은 얘기죠. 사람의 향기는 인위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악취는 자연적으로 나게 되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인간과 S가 느끼는 인간 사이에는 지구와 화성 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2. 초새벽에 일어나 세 시간 째 예정에 없던 번역일을 하고 있자니, 무슨 조화인지 이 일을 떠넘긴 후배에게 가졌던 무거운 마음이 좀 옅어집니다. 졸업 논문 쓸 때, 원전의 제 번역에 대해 시시콜콜 '선생질'하셨던 지도교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빙긋했어요. 
"번역에는 나르시시즘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그걸 극복해야지. 네가 한 건 거의  자유 작문인데? 번역은 공부고 원전의 가치를 전해주는 일이지 멋질이 아니야~"
제가 그 지청구를 담담하게 견딜 수 있었던 건, 제 번역과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 선생님이 일일이 원전을 보고 확인하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그런 노력들이 흥미롭고 좋아요.

3. 목이 따끔거리고 어깨가 결리는 게 몸살기인 것 같아 냉장고를 뒤져봤습니다. 작년 여름 조카가 귀국해서 복용하다 남기고 간 어린이용 시럽약이 있길래 두 스푼 따라 먹었습니다. 맛있네요.

맛있게 꿀꺽 삼키면서 저 자신에게 아프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지쳐 있는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듯이, 꼭 그런 것처럼 말이죠. 몸의 울증이 가시고 나면 또 한 세상이 등 뒤로 멀어질 텐데 그것마저 무슨 잘못이라는 듯이, 꼭 그런 것처럼 말이죠. 
몸 속의 바이러스 때문에 반짝이는 생물도 있다지만 그래도 앓지는 말아야지! (불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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