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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에 열린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전시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모던 아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된 것 같습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보편적으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현실의 외양을 조각조각 "해체"해버리는 것은 쉬운 작업일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다수의 대중이 현대미술을 저평가하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현대미술로 이뤄지는 해체작업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전적인 미화만을 숭배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어야한다는, 현실이 예술의 원본이어야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관념에 사로잡혀있다는 근거일테니까요.

재현이라는 행위는 어떻게 보면 열화본을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복제라 할지라도 그것은 원본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부모와 자식같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재현의 결과물을 보면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원본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멋진 초상화의 주인공은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지, 그림 속의 산과 강은 실제로 이렇게 푸르거나 안개가 깔려있을지 같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혹은 재현된 그림을 보며 원본 또한 이렇게 멋지고 근사하리라는, 원본의 미화에 충실히 복무하는 하인 같은 역할을 자동으로 부여합니다. 그런 점에서 피카소로 대표되는 큐비즘 및 다른 "모던"한 움직임은 그 원본을 완전히 상기할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수고 뒤틀어 놓았습니다. 왜곡과 변주를 넘어서서 원본의 이미지 자체를 흐트려놓을 때, 작가의 창조는 보다 독립적이게 됩니다. 원본을 알아볼 수 없지만 아무튼 분명히 존재하는, 그 어떤 원본이라도 그 그림의 세계에 들어가면 본래의 이미지의 부분들과 명암과 그림자와 3차원적인 '보여짐'이 죄다 왜곡되어버릴 것 같은 그런 별세계의 회화적 언어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적 원본의 최소한의 기준을 지킬 수 조차 없을 것 같은 대담한 재구축 현상입니다.

원본을 해체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당연히 원본의 세계 자체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는, 순수미술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형체는 거의 뭉개지고 원본의 흔적만을 간신히 추적할 수 있으며 화폭에 담긴 것은 누군가 붓질을 하기는 했다는 작업뿐입니다. 잭슨 폴록의 작품들은 가만히 보면 사람이 그린 게 아니라 붓이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털을 페인트 통에 담아서 캔버스 위를 온통 붓끝으로 휘젓고 다닌 느낌입니다. 윌렘 드 쿠닝의 작품 역시도 전혀 그 원본을 알아볼 수는 없고 그저 붓이 자동기술로 즉흥적인 뭔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추상화들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 할 때 불, 물, 재, 구름, 꽃 등의 현실세계의 사물을 끌고 들어오려는 제 자신의 한계를 계속 발견합니다. 다행히도 에른스트 빌헬름 나이의 작품 같은 경우 그 제목으로부터 그림과 장미와 리듬을 연결지으면서 추상화된 결과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만 친절하지 않은 작품들도 많으니까요.

앤디 워홀의 [두 명의 엘비스] (이 번역이 과연 정확한 것일까요. Double Elvis 는 두 배의 엘비스, 두번 반복되는 엘비스라는 개념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요) 는 4월 달에 후쿠오카 미술관에서도 엇비슷한 작품을 봤었기에 반갑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같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두번째로 봐서 그런 것인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원본과 재현의 질문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엘비스는 분명히 한명인데 두 사진이 중첩되어있으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하는 것일까요. 실제의 엘비스가 있으니까 두 사진 모두 '사본'일까요, 혹은 좀 더 옅게 인화된 오른쪽의 사진이 사본일까요. 그렇다면 실제의 엘비스를 기준으로 이 사진들은 가짜일까요. 아니면 진짜일까요. 팝아트 섹션 한가운데에 놓인 브릴로 박스들도 그렇고 앤디 워홀이 확실히 개념 자체가 비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뭐, 이런 고민과 무관하게 이 섹션에서 제일 좋았던 건 리차드 에스테스의 푸드샵이었습니다. 그림이 사진처럼 표현되어있으면서 유리창에 반사된 이미지도 다 표현하고 있는 그 느낌 자체가 회화는 이미 사진과 구분될 수 없다는 주장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랬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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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을 든 여인] by 게오르그 바젤리츠


아직까지도 회화를 보는 눈이 미천해 그림에서 제일 눈을 사로잡는 것은 대담한 색의 조합들입니다. 순수미술보다는 조금 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아방가르드 그림들이 특히 끌리는데, 그런 그림들이 시체나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 있을 때 중독적으로 더 바라보게 된달까요.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채찍을 든 여인]과 그 바로 옆의 페터 헤르만의 [부지]는 제 걸음을 완전히 멈춰세웠습니다. 이런 제 취향을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호주에 있을 때 실제로 봤던 프랜시스 베이컨이 제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데스 메탈을 듣는 사람들을 유치하다고 깔 형편이 안되네요. 하필 가슴에 박히는 타나토스의 취향이 누군가에게는 넥플릭스이고 저에게는 회화일 뿐일지도요.

회화적 상상력을 조금이라도 더 감각하고 나니 현실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따분하게 보입니다. 제게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재주와 나르시시즘이 없으니 그저 뮤즈의 축복을 받은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의 그림을 더 열심히 바라보며 짧게나마 화폭 안의 이세계를 눈으로 탐험하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 피카소와 20세기 거장들 전시회의 작품 사진들을 업로드한 블로그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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