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1989) 봤습니다

2023.05.31 16:35

Sonny 조회 수: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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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이번에 개봉하는 [인어공주](2023)을 보러가기 전에 원작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일단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내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Under the sea같은 유명 넘버만 기억할 뿐 다른 넘버들은 아예 처음 듣는 노래들이 많았다. 에리얼이 아버지와 왜 싸우는지, 왕자를 어떻게 처음 마주치는지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이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되려 흥미진진하게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 보았지만 결코 만만한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담고 있는 함의는 생각보다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영화에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다. 공주인 에리얼이 바다 바깥으로 나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육지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선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에리얼이 육지로 뛰쳐나가는데는 아버지 트라이튼과의 갈등이 가장 큰 기폭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만약 트라이튼이 아버지로서 조금 더 다정하고 소통이 잘 되는 아버지였다면 이 영화에 나오는 모험은 다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는 아버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딸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가부장제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시작은 어떠한가. 에리얼은 본래 가족음악회에 참석했어야 했지만 다른 곳에서 놀다가 상어와 추격전을 펼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다. 이 일로 아버지 트라이튼은 언짢아한다. 이 영화의 시작 자체가 자유분방한 딸과, 품행단정할 딸을 원하는 아버지의 충돌이다. 이후 에리얼은 바다 바깥으로 올라가서 불꽃 축제를 하는 에릭 왕자의 함선을 보고 이후 난파되는 배에서 그를 구해준다.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트라이튼은 인간 남자를 짝사랑하는 딸에게 크게 분노한다. 그래서 에리얼이 비밀스레 모아놓은 육지 물건들을 모조리 부숴버린다. 딸의 "덕질"을 못마땅해하며 그 수집품들을 다 부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것이 결정적인 갈등이 되어 에리얼은 마녀 우르술라를 찾아간다. 아버지가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통제만 하려고 하기 때문에 딸이 가출을 하는 것이 [인어공주]의 스토리다. 이 영화의 엔딩이 그 스토리를 다시 한번 조망한다. 딸이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세계에서 살게끔 아버지는 딸의 선택을 존중하게 된다.

이 스토리에 설정이 하나 더 추가된다. 그것은 주인공인 에리얼의 종이 바로 인어라는 것이다. 에리얼이 에릭 왕자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인어라는 이 태생적 종을 바꿔야한다. 이 영화에서 "종의 변화"라는 정체성의 질문을 파고드는 순간 이 영화는 복잡해진다. 사랑을 위해서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단순한 변화인가? 혹은 본래의 정체성의 폐기인가? 만약 인어가 인간이 되는 것이 단순한 변화라면, 왜 에리얼은 인간이 된 후에 인어로 자발적인 변화를 실천할 수 없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는 영화 내부에서 정체성과 로맨스가 충돌한다. 연애를 하고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든가, 정체성을 지키고 연애를 포기하든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된다.

[인어공주]를 현실에 대한 비유로서, 현실적 설정에 대입해서 보자. 만약 에리얼이 짝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어로서의 종을 포기하려는 그 마음이 동성애자로서, 짝사랑 상대와 다른 피부색과 국적으로서, 다른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계급으로서, 혹은 여타 정체성이 다른 존재로서 품은 마음이라면 어떻겠는가. 자신이 한국인인데 일본인을 좋아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만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 때는 국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바꿀 것인가.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내가 본래 태어난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점에서 [인어공주]의 텍스트는 어떤 엔딩이 해피엔딩일지 쉽사리 결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설정을 조금 더 넓은 범위로 치환해보자. 원래대로 태어난 나 자신이 있다. 이성애 로맨스라는 이 영화의 목표를 나와 타자의 관계, 혹은 나와 외부세계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해보자. 표면적으로 이 영화의 목표는 짝사랑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은 현실에서 친구되기, 학교나 회사 같은 사회적 조직에 소속되기, 사교집단의 일원이 되기, 정치인으로서 사람들의 신망을 받기 등 여러가지 현실적 갈등에 적용될 수 있다. 핵심은 나라는 한 개인이 타인의 세계, 내가 속해있지 않다는 세계에 성공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때 원래의 나라는 정체성을 버려야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원래 있는 세계와 내가 아직 들어가지 않은 세계, 원래대로의 내가 존재하는 세계와 원래대로의 나를 보일 수 없는 세계, 이 두 세계는 평등하지 않다. 그것이 주인공 (나)의 착각일지언정 어떤 세계는 자신이 속해있는 곳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멋져보이는 곳이다. 에리얼이 에릭 왕자의 함선을 맨 처음 발견했을 때, 그곳에서는 바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선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과연 무조건 지지해야하는 것일까. 그런 세계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라면 이것은 과연 긍정되어야 하는 꿈인 것일까.

이 설정을 아버지 트라이튼과 에리얼의 갈등에 대입해보자. 자신의 동족이 위험한 인간세계를 그저 동경하며 그 중 한명과 연애를 하고 싶어한다. 그 때문에 인어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려고 한다. 이 딸은 아직 어려서 바깥 세계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곳인지를 아예 상상조차 못한다. (영화는 이 우려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해산물" 요리를 내놓는 요리사가 부엌에 숨어든 세바스찬을 때려죽이려는 장면을 친히 보여준다) 이 때 에리얼의 자유로움을 아버지가 허락해줄 수 있는 것일까. 가부장제의 억압이라는 텍스트는 같은 종으로서, 정체성의 자부심과 직결된다. "우리"의 세계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후세대의 철없어보이는 이 동경과 자기혐오를 아버지는 당연히 내버려둘 수 없을 것이다. 트라이튼의 훈육 방식에 대해서는 당연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으나 그 꾸짖음을 정체성과 연결하면 이 문제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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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술라와 에리얼의 거래는 이 정체성의 문제를 심화시키는 텍스트이다. 우르술라가 에리얼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목소리"이다. 이 때 우르술라는 이것을 에리얼이 지닌 아름다움으로 인식하지만 이것은 영화상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효성있는 수단이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를 가리키는 표식 자체를 잃어버린다. 에리얼이 자신의 이름을 왕자에게 알리는 씬을 상기해보자. 이 둘이 데이트를 할 때, 왕자는 에리얼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그리고 다이애나, 레이첼 같은 잘못된 이름을 먼저 물어보다가 옆에서 세바스찬이 귀뜸해주는 것을 듣고 에리얼의 이름을 알아낸다.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이 장면은 에리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릴 수 없다는, 정체성의 소실을 가리킨다.

- 누군가는 이 지점에서 에리얼이 왜 음성언어 대신 문자를 써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것 또한 이 영화 속 두 세계관의 의미심장한 격차를 가리킨다. 에리얼은 문자를 모른다. 즉 이것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과 문자를 아는 사람 사이의 교류, 비문명과 문명의 교류를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세계관은 여자주인공이 자신보다 더 문명적으로 고도화된 세계를 바라고 그 수단이 결혼이라는 점에서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텍스트이면서 한편으로는 원시적 세계나 야생의 세계를 문명보다 아래에 두는 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 언어를 "영어"로 치환해본다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인간중심적이며 미국중심적인지를 곱씹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릴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사랑을 이루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혹은 상대의 애정을 얻는다한들 그것이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인가. 이런 점에서 이 영화의 연애 이야기는 조금씩 더 정체성의 문제를 로맨스로 은폐해버린다. 함께 하고 싶은 타인이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면서 원래의 세계와 결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으로 밀고 나아간다. 에릭 왕자는 에리얼이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은 알아차리지만 그가 인어라는 사실 앞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 종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고서 엔딩 장면에서 그저 평화롭게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의 로맨스는 이 정체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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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영화의 엔딩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가부장제로부터 딸이 벗어나는 텍스트로만 대답하고 끝난다. 그렇다면 인어로서의 에리얼은, 혹은 동족을 인간으로 변화시켜 인간의 세계로 보내는 인어들의 시선은 어떠한지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 개봉하는 [인어공주] (2023)의 이야기는 이 숙제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흑인이라는 명백한 인종적 차이를 두고 그 인종적 차이를 가진 두 세계를 인어공주는 어떻게 왕래할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과 연애라는 두 과제를 어떻게 균형있게 맞출 것인가.

무엇보다도 [인어공주]원작은 이 정체성 문제 중에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풀지 뭇한 숙제를 가지고 있다. 공주의 이야기지만 고작 결혼을 하기 위해, 한 남자의 신부가 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이 이야기는 결국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좋은 신부감이 되는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아버지의 가부장제에서 남편의 가부장제로 그저 종류만 바꿀 뿐 같은 가부장제를 환승하는 이야기가 과연 이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일까. 인어가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는 결국 여자가 남자의 세계에 "발맞춰주는" 그런 이야기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수십년 후의 속편이 아버지의 넘치는 이해심보다는 변화된 세계만큼의 지혜를 가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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