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벚꽃동산]을 보고 왔습니다

2023.06.01 09:56

Sonny 조회 수: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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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연극을 보면서 앞으로는 관람 전 무조건 각본을 읽고 가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벚꽃동산]의 각본을 읽는데 늦장을 부리다가 2막까지만 읽고 갔는데, 무대에서는 제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배우들의 연기가 펼쳐지고 있더군요. 각본을 읽으면서 이런 대사들을 이런 분위기에서 할 것 같다는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눈앞에서 보는 배우들의 연기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생명력이 가득했습니다. 앞으로 또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벚꽃동산]을 보더라도 제 기억에는 안똔체홉극장의 배우들이 이 연극에 대한 원형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제게 안톤 체홉의 연극은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첫번째는 얼마 전 이순재씨가 감독한 [갈매기]였는데, 아쉽게도 제 시간에 도착하질 못해 중간부터 보느라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 생각보다 극이 무거웠던 것도 있습니다. 무책임한 기성세대들 때문에 예술적 열정과 희망을 가진 젊은이들의 삶이 황폐해지는 그런 비참한 느낌이 진하더군요. 유명배우들의 연극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고 특히 이항나씨의 아르까지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박과 활기와 피로가 어우러져서 묘한 웃음을 이끌어낸달까요. 그 때 미리 각본을 읽고 갔다면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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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벚꽃동산]을 보게 된 건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때문입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가 그 뿌리를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에 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일가는 농장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계약이 아주 예전에 구두로만 이뤄졌기 때문에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늘 하던 것처럼 묵묵히 과수원에 물을 주고 과일을 따고 그걸 팔면서 점점 다가오는 농지 약탈의 디데이를 모르는 척 합니다. 이번에 [벚꽃동산]을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그 영화는 정말로 이 [벚꽃동산]에서 자라난 후세의 약간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농민의 계급이라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벚꽃동산]의 몰락은 계급을 막론하고 계승된다는, 훨씬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벚꽃동산]은 귀족 계급의 몰락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라네프스카야는 벚꽃동산을 포함한 본인의 영지가 모두 담보로 잡혀있는 상황에서도 그저 돈만 쓰면서 앞일을 외면합니다. 로빠힌은 옆에서 계속해서 이 영지를 별장 부지로 쓰고 임대료를 받으면 그 빚을 다 갚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지만 라네프스카야는 이를 듣지 않습니다. 라네프스캬아의 오빠 가예프 역시도 로빠힌을 못마땅히 여기며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며 숙모가 돈을 꿔줄거라는 기대만 하고 있습니다. 벚꽃동산의 경매일은 점점 다가오고 라네프스카야는 초조해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벚꽃동산이 팔립니다. 이들은 서글픈 얼굴로 이 벚꽃동산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가 인상적인 까닭은 체홉이 귀족 계급인 라네프스카야 가족의 몰락을 비웃거나 교훈거리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네프스카야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는 딱 속없는 부잣집 영애입니다. 그동안 어리석은 여자는 어리석은 인간의 표본으로 얼마나 많이 전시되어왔던가요. 그러나 체홉은 라네프스카야를 인간적으로 들여다봅니다. 라네프스카야는 딱히 노동자 계급의 승리를 장식하는 교훈거리나 풍자의 소재는 아닙니다. 라네프스카야에게도 한 인간으로서의 몰락과 쓸쓸함이 있습니다. 그는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비정하거나 타인에게 가혹한 인간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계급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라네프스카야를 인간적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 그의 계급적 정체성에서 "수탈"이라는 행위가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계급을 누리는 행위는 무분별한 소비와 적선입니다. 그는 당장 돈이 없으면서도 거지에게 금화를 주고 자기파멸적인 소비를 멈추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무능력한 귀족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면에서 라네프스카야의 어리석음은 운명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태생이 귀족이었고 모자란 것 없이 쓰기만 하던 그가 어떻게 갑자기 현실을 깨닫고 성실한 노동자로 탈바꿈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는 자본주의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우아하게 대표하는 사람 같습니다. 자본을 잠식해서 끊임없이 가치를 생산해내는 그 행위는 계급과 무관하게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것일테니까요.

그런 면에서 로빠힌이 벚꽃동산의 토지를 별장임대용으로 새로 내놓으라고 하는 권유를 라네프스카야가 거절하는 것은 양가적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는 로빠힌의 돈벌이를 "천박하다"고 분명히 표현하는데, 이것은 생계를 위해 애쓰는 그 노동 자체를 멸시하는 계급적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끝없이 자본주의에 복무하며 모든 것을 사고 파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물질주의적 태도에 대한 저항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벚꽃나무들을 다 베어버리자고 하는 로빠힌의 그 말은 이상할 정도로 세속적이고 잔인하게 들립니다. 돈이 되지 않을지언정, 벚꽃으로 가득찬 정원은 아름다움과 오래된 기억을 머금고 있는 그런 장소이기도 할 테니까요. 벚꽃동산의 철거는 라네프스카야의 재산이 처분되는 것만이 아니라 라네프스카야라는 한 사람이 추구해온 미덕과 인생 자체가 모두 베어져나가는 듯한 공포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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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에서 라네프스카야의 공포와 혼란이 가장 극대화됩니다. 그는 자신의 영지가 팔리는 경매일 당일에도 사람들을 불러모아 파티를 엽니다. 라네프스카야의 이 무모한 파티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안을 이겨내려는 내면적 투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라네프스카야도 초조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는 억지로 웃으면서도 혼자가 되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집니다. 억지로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가도 혼자만 되면 이내 가라앉는 라네프스카야를 보면 이 3막 전체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라네프스카야 본인은 전혀 즐길 수 없는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이 나있고 뻬쨔는 옆에서 자꾸 노동을 해야한다며 설교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경매장에 직접 갔었던 가예프와 로빠힌이 돌아옵니다. 로빠힌은 술에 잔뜩 취해있습니다. 과연 경매는 어떻게 끝났을까요.

경매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라네프스카야의 영지는 팔렸습니다. 그 벚꽃동산은 결국 팔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결과이지만 이상하게 충격적입니다. 비참한 미래가 막상 현재로 들이닥칠 때 그 전에 한 각오가 아무리 성실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갑자기 로빠힌이 미친 듯이 웃습니다. 그는 그 영지를 사들인 게 바로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라네프스카야의 영지가 팔려나가지 않기 위해 그렇게나 이런 저런 제안을 하고 혼자서 심각하게 이 문제를 대하던 그가, 결국 벚꽃동산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배은망덕하게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로빠힌은 부지런한 상인이고 애초부터 라네프스카야는 로빠힌의 충고를 귓등으로 흘려넘겼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혼자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는 로빠힌을 보면 괜히 더 처참해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영지를 샀다고 배신자처럼 기뻐날뛰는 로빠힌은 라네프스카야의 거의 유일한 경제적 지원군이었습니다. 소작농의 꼬마 아들이 이제 커서 귀족의 영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역사는 완전히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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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막에서 라네프스카야 가족은 모두 떠날 준비를 합니다. 이들의 위치는 조금씩 바뀌어있습니다. 가예프는 은행에 취직했고 라네프스카야는 다시 프랑스로 떠날 준비를 합니다. 아냐는 뻬쟈와 함께 노동자로서 살아갈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 중 제일 박복해보이는 것은 장녀 바랴입니다. 그는 다른 집의 가정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로빠힌이 프로포즈를 해주길 기다리지만 로빠힌은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정원에 일을 하러 가버립니다. 그 둘이 결혼을 했다면 바랴는 주인이 바뀐 벚꽃동산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텐데요. 체홉은 이 가족의 해체를 안타깝게 쳐다보지만 그 누구도 이 정원으로 다시 불러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복수형 인물처럼 보입니다.

이 동산을 떠나기 전 라네프스카야는 눈물을 머금으며 작별인사를 건넵니다. 그의 어리석음에도, 눈물어린 인사가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한 치 앞을 모르고 현재의 행복과 낙관에 취해사는 현재진행형의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소포스는 베짱이를 나무라고 근면한 개미를 본받으라 했지만 우리 중 어느 누가 현재의 행복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그 잔혹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라네프스카야는 그래도 굳건하게 벚꽃동산을 떠나갑니다. 인물들 중 그 누구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삶의 터전은 사라졌고 다른 방식의 삶이 갑자기 찾아왔지만 이 가족들은 의연합니다. 단 한 사람, 신분제의 역사에 영원히 머무르기만 했던 하인 피르스만이 이 집에 남겨집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계급제와 러시아의 역사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이 시기적으로 꽃이 만개하고 아름다운 기억이 가득한 "젊은 시절"을 벚꽃동산처럼 가지고 있다가 이후 그 개인적인 벚꽃동산을 철거당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늚음이라는 단계로 쫓겨나갑니다.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비록 비참함을 참을 수 없더라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래서 라네프스카야의 그 비통함과 의연함은 제게 묘한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그 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어떤 이는 계속해서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 대학로의 안똔체홉극장은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고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해서 시즌권을 살까 고민 중입니다. 앞으로도 체홉의 다른 연극들은 죄다 여기에서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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