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프레디 머큐리, 퀴어

2020.10.01 16:52

Sonny 조회 수: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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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나훈아 콘서트를 봤냐고 여쭤봤습니다. 당연히 봤다면서, 극찬을 하시더군요. 원래 문화생활에 크게 관심이 없으시고 문재인 지지자면서 이상하게 티비조선 시사예능을 즐겨보시는 어머니가 어떤 공연을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나훈아 정도는 해야 노래한다고 하지 다른 것들은(뉘앙스 상 미스터트롯) "께임"이 안된다면서 흥분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어제 트위터 탐라도 폭발해있더라구요. 한국 예능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이상하다 싶으면 챙겨보는 모 칼럼리스트는 또 본인만의 장기인 캡쳐 실시간 중계를 했고 수많은 드립이 터졌습니다. 평창 올림픽 개/폐막식을 잇는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전 못봤지만, 그냥 다른 시청자들의 표현으로 대신 즐겼습니다. 난리장판에 굳이 저까지 끼어들 필요를 못느낄 정도로 다들 광란의 탐라를 장식하고 계시더군요.


어제 그 난리판을 보면서 저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떠올렸습니다. 이 영화 자체야 사실 크게 대단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한 건 한국에서 이 영화가 흥행한 과정이죠. 아니 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나오면서 잘해야 300만... 정도로 흥행을 예측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영화 좋아하는 다른 분들도 그냥 상업영화 공식에 충실한 뮤지컬 장르 영화고 대단한 영화적 성취로 보기에는 어렵다 정도가 중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탐라에서 돌고 도는 겁니다. 프레디 머큐리의 일화도 돌고 돌고... 그러더니 흥행이 멈출 기세를 안보이고 무슨 컬트영화로 돌변해버리더군요. 찾아보니 최종 관객수가 994만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프레디 머큐리에 빠져들고 퀸을 마구 덕질하면서 이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더군요. 퀸이 대단한 가수고 프레디 머큐리의 인생은 아주 극적이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흥행할 일인가? 싶었습니다. 더 희한한 건 이 영화가 명백한 "동성애 영화"로서 오히려 그 소재가 흥행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열번 스무번 본 광기어린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면서 거의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예능인들은 너도 나도 메리야쓰에 청바지를 입고 프레디 흉내를 냈고요.


나훈아와 프레디 머큐리는 딱히 공통점이 없습니다. (얼굴형이 약간 닮긴 했지만) 다만 아티스트로서 대중에게 어필하는 지점이 좀 비슷한 것 같아요. 프레디 머큐리나 나훈아나 인기를 끌만한 아주 대중적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선이 굵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 자신의 에고를 두려움없이 펼치고 설득하는 과정이 조금 비슷해보입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두 사람 다 멋지다고 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어요. 특히 어제 나훈아씨의 공연 장면 중 등 뒤에 날개를 펼치는 CG 장면이 사람들에게 많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냥 보면 좀 유치한 장면이거든요. 그 날개를 펼치는 장면 뒤에 무슨 비장한 노래도 아니고 "난 그냥 왠지 너가 좋아" 같은 가사이고... 이게 뭐야..!! 하고 황당하게 하는데 그 이상한 지점을 보는 사람 스스로 극복하게 만듭니다. 프레디 머큐리도 그렇잖아요. 발레복 입고 나다니는 모습을 보면 팬이어도 어우... 쒯... 소리가 절로 나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노래에 심취하는 모습이나 관객에게 호소하는 그 진심이, 너무 강렬해서 그걸 도저히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훈아 같은 경우 "테스형"이라는 해괴한 노래를 들고 나와도 그걸 비웃는 동시에 뭔가 빠져버리는 거죠.


나훈아와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는, 사전적 의미로 퀴어한 것 같습니다. 뭔가 되게 이상하고 망측한데 그걸 조롱하면서 깔아뭉개지는 못하겠는 겁니다. 저게 뭐야... 이상해... 근데 왜 자꾸 내 귀에 꽂히지...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감각을 기준으로 봤을 때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그 비정상이라 여길만한 무엇을 비범하다고 수용자 스스로 해석하며 자꾸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요. 제가 며칠 전 친구에게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 공연영상을 보여줬는데 보자마자 기겁하더군요. 이 사람 뭔데 이렇게 숏팬츠만 입고 싸돌아다니냐고. 그 첫인상에서 넘기 힘든 진입장벽이 분명히 있습니다. 나훈아씨도 공연에서 그렇게 교태를 부리고 관객과 썸을 탔다고 하더군요. 보통 상식으로 70대 남성 노인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그렇게 애교를 부리면서 무대위에서 공연하는 건 별로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거기에 흥분하고 껌뻑 죽더군요. 이 이상하지만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은 두 사람의 희한한 미쟝센과 선굵은 외모가 언밸런스하게 합쳐지며 만들어지는 퀴어함에 있는 것 같습니다. 딱히 어울릴 것 같지도 않고 분명히 따로 노는데 그게 퍼포먼스의 힘이라든가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이 섞이지 않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양립하게 하며 각각 어필하게 만드는 그런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미워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심리적 필터를 자동으로 장착하게 만든다고 할까요.


이게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이상하기만 하면 그냥 이상하다고 욕만 먹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례로는 비의 깡이 있습니다. 딱히 대중가수로서 크게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데 스스로 자기가 왕이니 어쩌니 하면서 허세만 떠는 그 노래는 정말이지 신드롬에 가깝게 욕을 먹었죠. 지금에야 어떤 밈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밈의 시작은 분명히 조롱과 경멸에 가까웠습니다. 아마 비의 깡이 음악적으로 재평가를 받거나 감동적인 명곡으로 소비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비와 나훈아, 비와 프레디 머큐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퀴어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퀴어함을 가르는 지점은 가수 본인의 정체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는 게이였고 나훈아는 70대 노인입니다. 어찌됐든 사회적 약자로서 뭔가를 이겨낸다는 그 감상이 자연스레 녹아듭니다. 실제로도 이 두사람의 퍼포먼스는 남들이 뭐라든 이상하게 보일 걸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펼치는 용감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에 반해 비는 이미 성공한 선배 가수이자 30대 이성애자 남자로서 철저히 강자의 사회적 입지를 갖추고 있죠. 깡이라는 노래는 실험적 도전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먹히겠지, 하고 안이하게 유행헤 편승한 사례입니다. 거기에 창작자로서의 독창성이나 애정은 찾기 힘듭니다. 나훈아와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힘이나 세를 어필하며 애정을 유인한 게 아니라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완전히 잊고 몰입하는 것이 퀴어적으로 새로운 전복과 몰입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퀴어하다는 것은, 무언가가 이상하지만 아주 열정적이고 자기애에 가득찬 "약자"의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형태는 늘 아주 강렬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로운 게 아니라 혼재하는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구요. 어찌됐든 그 형식 안에서 퍼포먼서의 타오르는 에너지는 다소 난해하고 엉성해도 그 형식 자체를 뚫고 전달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아도 그 에너지 자체를 즐기면서 다소 이상한 형식마저도 즐기고 마는 것 같아요. 이런 생각도 듭니다. 퀴어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뭔가를 좋아할 때 그 좋아한다는 에너지가 일사천리 순탄하게 장점과 훌륭함만을 즐기는 무엇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불완전함과 결점이 오히려 뭔가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수용자 스스로 뛰어넘어야 할 역경이자 하한선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나훈아 임팩트의 핵심은 그런 것 같습니다. 약할 것 같은 노인이 정력을 뿜어내고, 품위와 정중함을 요구받는 기성세대가 가장 자유롭게 날뛰고, 미학적 완성도를 걱정하는 대신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만의 미감을 펼쳐내는 그 자신감이 모두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퀴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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