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분장실 보고 왔습니다

2023.05.16 09:45

Sonny 조회 수: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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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직접 봤던 것이 참 다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활용되는 또 다른 작품을 보면서 그나마 덜 어려워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 연극의 첫 장면에서 C가 외우는 대사가 니나의 대사라는 걸 알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왜냐하면 니나는 갈매기란 작품 속 세계에서 배우가 되기를 원했고, 배우가 되었지만 별 성취를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그런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계속 연기를 하고 싶어!'라고 외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와, 그 배우가 맡은 캐릭터를 자신도 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배우들이 이 분장실에는 모여있습니다. 배우의 꿈을 꾸는 배우를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의 꿈들은 몇겹의 액자 형식으로 이 공간 안을 채우고 있는지요.

C가 니나 역을 맡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면 A와 B의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됩니다. A는 배우로서의 연기를 한 적은 거의 없고 프롬프터로서 배우들을 보조하는 경험들만 가득합니다. B는 조금 더 발랄하고 귀여워보이지만 연극의 교과서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A로부터 타박을 받습니다. 그 둘은 C가 얼마나 대사를 못외우는지, 자기가 저 역을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느니 하며 흉을 봅니다. 그리고는 올 뻔 했지만 흘러가버린 자신들의 주연 기회를 곱씹으며 자신들끼리 연기 배틀을 펼칩니다. 그 둘은 그렇게 놀며 즐거워합니다.

A와 B는 같은 타입의 연기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건 배우로서 이루지 못한 꿈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무대에서, 이들은 작은 책임을 맡는 무명의 배우 혹은 스탭으로서 놓쳐야했던 주목의 순간들을 아쉬워합니다. A와 B가 떠드는 이 대화로 채워지는 분장실은 단순한 용도 이상의 공간이 됩니다. 그곳은 연극을 준비하기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꿈들이 계속 맴도는 공간입니다. 꿈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그 꿈은 얼마나 많은 한숨과 절절함의 형태로 맴돌고 있을까요.

D가 갑자기 등장한다. 아직 어려보이는 그는 베개를 끌어안고 등장해서 아무데서나 잠을 잡니다. 그는 연극을 마치고 분장실로 내려온 C에게 자신의 배역을 되돌려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 전까지 A와 B의 숙원이 자신들끼리의 아쉬움이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 꿈을 이뤄낸 사람과 그 꿈을 자기걸로 하고 싶은 사람의 갈등이 터져나옵니다. 그저 아쉬워하거나 뒤에서 꿍얼거리기만 하면서 배우의 꿈이라는 게 분장실에 머무를 리가 없습니다. 절실한 꿈은 예의와 체면과 공정 같은 모든 약속을 다 뛰어넘으려 하니까요.

C는 D에게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언성을 높여가며 싸웁니다. 계속해서 매달리는 D가 있고 이를 좋게 타이르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C가 있습니다. C에게도 니나의 배역은 소중한 것입니다. 갈매기에서 니나가 이루고자 하는 꿈은 다소 고독한 투쟁이었지만 이 곳 분장실에서는 제각각의 형태로, 다른 이의 꿈과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니나를 연기하는, 니나가 부러워했을 C조차도 자신의 꿈을 뺏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입니다. 그가 울부짖으며 자신의 배역을 지키려는 장면에서 꿈이란 것이 곧 스트레스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 (이 부분부터 스포일러)

D는 A와 B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그걸 잘 들어주던 두 사람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에게 보인다는 건, 너도 이제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된 거라고. A와 B는 사실 유령이었습니다. 그 분장실은 여태 C가 혼자서 연습을 하거나 쓰고 있었고 잠을 못자며 병약해져있던 D는 결국 이승을 떠난 상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후반에 드러나는 이 사실은 분장실이란 공간의 이미를 환기시킵니다. 단지 귀신이 머문다는 으스스한 느낌이 아니라, 그곳에는 배우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도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 연기한다고 믿는 순간조차도 같은 꿈을 가진 다른 존재들이 계속 지켜보고, 또 참견하고, 혹은 앙상블을 이루며 함께 존재합니다. 자기 혼자만의 고독한 연습이 다른 사람의 꿈과 조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면, 모든 고독은 사실 다른 이의 꿈으로 위로와 격려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이대로 작품이 끝난다면 이것은 C를 향한 일방적 위로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D의 격려로 여태 분장실 안에만 머무르던 A와 B는 무대 위로 올라갑니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도 없지만 이들은 허락받은 적 없는 자신들의 연기의 꿈을 마음껏 펼쳐보입니다. 그 순간 이 분장실은 무대가 되고 이 연극을 보는 우리 관객들은 본래 텅 비어있을 객석을 채워주는 관객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관객은 이 유령배우들을 응원하면서, 이 유령배우의 캐릭터들을 연기하는 실제 배우들을 응원합니다. 그 순간 분장실이라는 작품은 제 4의 벽을 초월해 현실 세계와 연결됩니다. 유령 배우들이 넘지 못했을 작품 속 관객과 배우들의 그 경계를,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초월해 넘는다는 것은 무대 위 배우들이 실제로 연기하는 연극이란 장르에서만 가능한 마술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커튼콜은 관객과 배우 사이의 형식적 예의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치 이 작품의 관객들이, 작품 속에 존재하지 않는 관객들을 대신해 유령을 소환하고 배우들의 꿈을 알아차려주는 소환식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박수를 치는 것은 단순히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을 긴 시간의 노고와 실패까지도 다 알아차려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연극 분장실은 배우들의 실패와 성공, 그 뒷면에 가리워진 강박과 고통까지도 껴안아줍니다. 작품으로 배우들을 위로하는 이 기묘한 형식 속에서 관객들은 배우를 위해 동원된 또 다른 캐릭터들처럼도 느껴집니다.

갈매기에서 니나는 위로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니나를 연기하고 싶어했던 배우들을 이 작품 분장실은 위로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니나들의 이야기이며 그 니나들의 이루지 못한 꿈이 갈매기 시체처럼 차갑게 식어가지 않도록 안아주고자 하는 작품입니다. 피날레에서 A와 B와 D는 해맑게 웃으며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C는 관객의 박수 속에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모두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는 대신 결국 배우로서의 고독함이 따로 남겨져있는 채로 끝나는 것도 분장실의 독특한 엔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석정 배우의 A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가끔 티비에서 예능 캐릭터로 보는 그의 에너지가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연극 무대에서는 너무나 잘 어울렸고 무대를 꽉꽉 채워줬습니다. 영화 속에서 비참한 꼴을 자주 당하던 서영희 배우의 B도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 안톤 체홉의 세자매를 보지 못해 이 연극의 엔딩의 함의를 다 읽지 못한 게 아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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