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족'(1)

2023.05.18 21:31

thoma 조회 수:313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을 읽었어요. 

'아베 일족', '무희', '기러기', '다카세부네'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단편집 경우에 편집자들이 작품 순서를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지 문득 궁금한데, 저는 시간상 먼저 나온 작품부터 짧게 소개하겠습니다.


'무희'(1890)

국비로 독일 유학을 간 주인공이 그곳에서 만난 어린 여성과 살다가 본국에서 온 지인의 권고에 의지해서 그 여성을 버리고 귀국하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흔해빠지고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여성이 극단 소속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직업을 가졌긴 하지만 무희로서의 직업적인 특성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 어린 여성 자체의 개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냥 홀어머니와 사는 가난하고 순진하고 어린 여자입니다. 저는 읽으면서, 읽고 난 후에도 이 인물을 떠올리면 독일 여성이 아니라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무희'라는 제목은 이 여성을 고정 이미지에 가두고자 하는 의도만이 느껴집니다. 

화자는 주어진 길 안에서 기계적으로 안정을 도모하며 살아온 자신의 성격을 몇 번이나 탓합니다. 무희와의 관계가 소문나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생계유지에 허겁지겁할 때는 친구의 도움에 난파선이 섬을 만난듯 의지했으면서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자신의 성격뿐만 아니라 의지력 없는 자신을 옆에서 부추겨 여자를 버리고 떠나게 만든 친구를 원망합니다. 남 탓을 하기까지 하니 화자의 비겁과 의지박약을 두드러지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요.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합니다. 연보를 보면 모리 오가이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독일에서 뒤따라온 여자가 있었고 집안에서 돌려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소설이 화자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마무리된 것은 작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부끄러움을 글로 남겨놓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기러기'(1911)

화자가 대학 때 하숙을 함께하던 '오카다'라는 인물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화자가 곁에서 본 것과 오카다 본인에게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다 보면 오카다나 화자가 알 리 없는 상대 여성의 일상과 심리가 어떻게 서술이 가능한지 의아한데, 이야기의 끝에 가서 화자 자신도 사건의 시간이 지난 후에 상대 여성을 알게 되어 그때 일을 들었고 그래서 전부터 알던 것과 뒤늦게 알게 된 것을 조합하였다고 밝힙니다. 앞 문장에서 사건의 시간이라고 했으나 흔히 이런 이야기의 흐름에서 예상할만한 뚜렷한 사건이랄 게 없습니다. 오카다는 의대 재학생이고 그가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코스에 있는 길갓집에 외로이 사는 상대 여성은 고리대금업자의 아름다운 첩입니다. 

위에 모리 오가이의 첫 소설에 비하면 이 작품은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짜나가는 솜씨가 훌륭하고 인물들의 속내를 헤아려 보게 하는 여백의 힘이 있으면서 인간사의 덧없음도 아울러 담고 있어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건이라 할만한 것은 길갓집 새장에 있는 새를 노린 뱀을 둘러싼 소동 정도가 있는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그 생생하고 무서운 묘사로 긴장이 되었어요. 소설을 읽으며 놀랄 지경이 된 장면을 만난 것은 오랜만이었습니다. 

110페이지 정도 분량의 이 소설은 연재소설이었다고 하는데 작가가 창간한 문예잡지 '스바루'를 통해 연재했을까요. 육군 고위직에 있으면서 문예지를 운영하고 이런 작품까지 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표제작인 '아베 일족'과 아주 짧은 단편 '다카세부네' 감상은 다음 글로 이어 쓰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86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438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3201
123554 이런 조건이면 무인도에서 한평생을 보내겠습니까 [28] 가끔영화 2010.07.11 3421
123553 오늘 있었던 일... [4] Apfel 2010.07.11 1655
123552 요 며칠 게시판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8] art 2010.07.11 3923
123551 신작 애니. [1] catgotmy 2010.07.11 2478
123550 스타크래프트를 영화화하면 꽤 멋질것 같지 않나요? [14] setzung 2010.07.11 2855
123549 라쇼몽과 비슷한 형식의 소설이나 영화 좀 추천해 주세요~(스포가 있으려나요..) [9] phylum 2010.07.11 3331
123548 저도 구로자와님 작품좀 [7] 감동 2010.07.11 2191
123547 오늘 구글..... 월드컵 결승전에 바치는 로고 soboo 2010.07.11 2974
123546 스페인의 승리에 걸어보죠. [13] nishi 2010.07.11 2673
123545 [잡담] 최근에 읽고 말고 하고 있는 SF 작품들, 독일출시 한국 영화 블루레이들 (뭐... 7급 공무원?!) [12] Q 2010.07.11 3019
123544 어..라? 등업이 [3] 구름그림자 2010.07.11 1815
123543 바낭.. 주말에 이것저것.. [1] 서리* 2010.07.11 2069
123542 [듀나in] 음악 영화 추천 좀 해주세요. [9] 발없는말 2010.07.11 2294
123541 신동엽의 재기를 바라며.... [24] 매카트니 2010.07.11 6521
123540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이란 소설 기억하시는 분? [5] Apfel 2010.07.11 2376
123539 [인생은 아름다워] 29회 할 시간입니다 [80] Jekyll 2010.07.11 2899
123538 [듀나인] 이런 장면 나오는 영화 [4] khm220 2010.07.11 2058
123537 뻘글.. 아.. 일요일 밤에 하면 안되는거.. [14] 서리* 2010.07.11 3111
123536 여성분들 궁금합니다 [11] august 2010.07.11 3674
123535 내게 주는 떡밥.. 알랭 드 보통의 책 [7] 크게 휘두르며 2010.07.11 287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