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지만(사실 뜬금없지 않음) 제가 좋아하는 헐리우드 여자 배우들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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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어스틴 던스트의 전성기는 엄밀히 말하면 2010년대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는 94년도에 데뷔작에 가까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클로디아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브링 잇 온]에서 패기와 어리숙함이 맞물린 치어리더 리더 토랜스 역할로 틴에이저의 이미지에 도장을 찍었죠. 이후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MJ로 MTV 세대를 대표하는 여자배우가 되었습니다. 이후 [윔블던], [엘리자베스 타운] 등에서 자유분방한 20대 여자 역할로 로맨틱 코메디를 흥행시키기도 했고 이 장르의 교과서가 되버린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사랑과 기억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을 매리라는 캐릭터로 내놓았습니다. 그는 2010년 이전까지 "요즘 여자"의 대표자 중 한명으로서 사랑스럽고 통통 튀는 그런 매력을 보였죠. 


그 전까지의 필모는 분명 상업적으로나 연기자의 성취의 면에서 굉장한 것이었습니다만 2010년 이후의 그가 써내려가는 필모 역시 굉장히 독특합니다. 저는 보다가 졸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멜랑콜리아]의 답없는 신부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 전의 필모에 비해 조금 더 자기파괴적이고 음울한 기운이 훨씬 더 짙어졌는데, 이것은 꼭 이 배우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상업적 측면 대신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담고 있는 캐릭터들을 그가 연기하고 싶어한다고도 볼 수 있겠죠. 저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그가 제일 청순하고 착한 에드위나를 맡았다는 것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파워 오브 독]에서도 점점 알콜중독의 수렁에 빠져가며 고립되어가는 로즈 역을 잘 연기했었죠. 2010년 이후의 이 필모를 제가 특별하게 기억하는 건, 2010년대까지 패셔니스타(그의 자켓 착장 사진들이 아직도 기억납니다)이자 애정가득해보이는 그의 이미지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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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캣 데닝스를 처음 봤던 건 [마흔살까지 못해본 남자]에서 좀 맹해보이는 10대 딸 역으로 나왔을 때였습니다. 딱 봐도 말썽부리게 생긴 관상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의외로 순둥하게 나와서 좀 재미있었죠. 이 배우가 후에 토르 시리즈에 감초조연으로 나와서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토르가 거의 리부트되다시피 제인과의 연애 서사를 아예 치워버리는 바람에 이 배우도 치워져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다행히도 완다 비젼에 나오긴 하더군요) 드라마로 더 유명한 배우로 알고 있는데 제가 미드를 거의 보지 않아서 팬질을 할 수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합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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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의 헐리우드를 수놓은 수많은 여자배우들이 있겠지만, 2010년부터 20년까지 그 10년간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를 하나 뽑으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마고 로비의 할리퀸을 뽑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개봉했던 2016년 당해의 할로윈에는 코스튬의 한 80%정도가 할리퀸이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죠. 헐리웃의 배우라는 직업이 단순히 연기로만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 상업적, 문화적으로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걸 본다면 마고 로비가 창조해 낸 할리 퀸의 이 이미지는 가히 압도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할리퀸이 이쁘다거나 섹시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관객들에게 거의 상처 수준의 파괴적인 이미지를 심어놓았습니다. 한국 한정으로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로 하나의 상징이 되었듯이 마고 로비는 할리퀸으로 '이쁘고, 귀엽고, 미친X'의 한 전형을 만들어냈습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이후의 필모그래피입니다. 돌아이 여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이, 토냐]의 토냐 하딩 같은 역할을 맡는가 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에서는 많은 우려에도 샤론 테이트 역을 훌륭하게 선보였죠. 저는 아직 못봤지만 [밤쉘]같은 작품에도 나왔었구요. 그가 할리퀸이라는 캐릭터를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한 후속편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여성주의를 영화 속에 녹여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런 행보가 수많은 남성들에게 "여신"으로서 떠받들어진 다음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는 단순히 "여신"으로 추앙받으려는 대신 여성의 정체성을 영화로서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그런 커리어를 쌓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합니다. 이것이 꼭 사회적인 평가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빌론]은 마고 로비의 정신나간 연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래저래 2010년대 알찬 필모와 화제성을 몰고 다니는 그는 헐리웃에서 최고로 핫한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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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왓슨에게 2010년대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을 겁니다. 그에게 상업적 성공과 팬덤을 보장하던 해리포터 시리즈가 끝나면서 더이상 '허마이오니'가 아닌 다른 모습을 배우로서 증명하는 시간이었을테니까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어오던 이 아역출신 배우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했습니다만, 저는 [월 플라워]를 보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다 버려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가 무대 위에서 혼성 듀오로 춤을 추는 장면은, 자신은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라는 하나의 영화외적 선언같기도 했달까요. 바로 이후의 [블링 링]에서도 대책없는 좀도둑 역할을 해내면서 영화 자체의 실패와 무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갱신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죠. 


특히 [작은 아씨들]에서의 사려깊은 조 역할은 이 배우가 가진 천성과 성실한 연기 스타일, 그의 외양이 잘 맞아떨어지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자기 자리를 꽉 채우는 든든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진중한 멜로나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상업적인 대박은 터트리지 못할지언정 배우로서 계속 자기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여전히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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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트와일라잇]으로 자신의 필모에 거대하고 비극적(?)인 불씨를 막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헐리우드 가십퀸으로 떠오르면서 온갖 타블로이드지를 점령하고 락스타가 되었죠. 이런 크리스틴을 보면서 저 배우는 언젠가 깐느의 심사위원이자 베를린 영화제의 최연소 심사위원이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2010년대를 이 정도로 파란만장하게 보낸 배우가 또 없습니다. 2023년 지금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보면 그 위상과 커리어가 너무나 예측불허의 결과여서 그런 우스갯소리가 떠오릅니다. 주연배우 두명이 몇년간 아트영화만 줄창 찍는 걸 보면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찍으면서 얼마나 피폐해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요.


누가 제일 잘나가냐, 누가 제일 이쁘냐, 이런 질문이라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꼭 그 답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우가 쌓아올린 배우이자 스타로서의 그 이미지는 감히 다른 배우들이 덤빌 만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현재 21세기 헐리우드의 여자배우중 유일무이한 히피이기 때문이죠. 품위와 반항기와 예민함과 수려함을 다 갖춘 배우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복잡한 질문에 대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가능하다고 자기 존재로 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본 [스펜서]는 굉장히 훌륭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올리비에 이사야스와의 두 작품도 언젠가는 꼭 복습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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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헐리우드 여자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엘 패닝을 마지막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 배우를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레피센트]의 오로라 공주를 떠올리는데, 저는 그 익숙한 이미지를 좀 파괴하고 싶은 팬심이 있습니다. 대중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고 또 소비하고자 하는 '프린세스'로서의 이미지를 내보인 뒤 이 배우는 2년 뒤에 바로 [네온 데몬]에서 타락해가는 어린 패션모델을, [어바웃 레이]에서는 트랜지션이 아직 끝나지 않은 남자 트랜스젠더를 연기했습니다. 필모로만 본다면 난 이쁘기만 한 공주 아니거든? 하고 여봐란듯이 파격을 감행한거죠. [네온 데몬]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답게 엄청난 미쟝센을 자랑하고 [어바웃 레이]는 꽤나 재미있는 드라마입니다. 이후의 필모도 내가 이 구역의 못말리는 또라이다! 를 외치는 것 같죠. 사실 그 전부터 저는 [진저 앤 로사]에서 이 배우의 다각적인 아름다움을 미리 파악해놓긴 했습니다만.


아직 보진 않았지만 [더 그레이트]라는 드라마도 꽤나 흥미로워보입니다. 정말이지 이 배우의 필모는 별 게 다 있는 뷔페같습니다. 팬이라고 하기에는 이 배우의 영화를 못본 게 너무 많아서 머쓱하기도 하고 또 든든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파헤칠 게 많은 보물상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한 때는 이 배우가 깜찍하고 순수해보이기만 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극복할지 좀 궁금했는데 이 배우는 계속해서 이상하고 요사스러운 캐릭터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를 내놔도 항상 기대가 되는 배우는 흔치 않고 저는 이 배우가 작품의 선구안이 꽤나 괜찮다고 느낍니다. 그의 실험에 기꺼이 어울려줄 용의가 있습니다. 


지극히 제 개인적 취향으로 썼고 빠트린 배우들이 한가득이니 챌린지 형식으로 자신만의 페이버릿 (2010년대) 헐리웃 여자배우들을 써주시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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