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셀로를 보고

2023.05.14 11:53

Sonny 조회 수: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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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의 컨셉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갔기 때문에 정통연극만 생각하고 갔다가 처음부터 좀 당황했습니다. 현대식 의복을 입고 현대식으로 말하는 손상규의 이아고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더군요. 이 작품을 희곡으로 읽기만 했을 때는 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무대 위의 극을 보니 확실하게 실감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극을 이끌어가는 최대의 안타고니스트이자 해설자로서 이아고가 오히려 주인공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과 게획을 미주알고주알 방백으로 다 털어놓는 장면들은 너무 연극적이라고 느껴지면서도,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비극"의 핵심을 잘 살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관객은 이아고의 계획을 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들은 정말 나쁜 방향으로 꼬여만갑니다.

이 연극을 보면서 제일 의아했던 건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톤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유태웅씨의 오셀로와 이설씨의 데스데모나는 이 극에서도 유난히 톤이 튀더군요. 데스데모나는 혼자만 21세기 현대에 사는 사람처럼 사근사근한 현대식 어조로 말을 합니다. 그에 반해 오셀로는 혼자만 고전극에 머무르는 것처럼 진중하고 근엄하게 말을 합니다. 이 판이한 어투는 특히나 이 부부가 함께 대화를 할 때 불협화음을 냅니다. '자기야, 저녁 뭐 먹을래?'라고 아내가 말하는데 남편은 '그 어떤 만찬보다도 당신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내 허기를 씻어준다오'라고 대화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대사가 아니고 예시일 뿐입니다)

이 부부의 시간축은 엇갈려있습니다. 아내는 현대의 시간 속에 살고 남편은 중세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함께 화목한 장면을 보일 때에도 그것은 각자 환상속에 빠져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의 환상을, 데스데모나는 오델로의 환상을 각자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극이 펼쳐지는 세계에서 어딘가 뒤틀려있는 이 두사람의 관계 자체가 이미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환상은 언젠가 스스로 깨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엇갈린 시간축은 관객에게 똑같은 거리감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어투로 말하는 데스데모나가 극의 배리어를 뚫고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닿아있는 느낌이라면 혼자서 진중하게 말하는 오셀로는 그만큼 관객에게 더 멀리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파행은 둘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아닙니다. 고전 속의 남자가, 같은 시대에 사는 우리 중 한명의 여자를 죽인 느낌이 듭니다. 고전 원작의 시간축 위에서 돌아가는 이 극 속에서 데스데모나가 살해당한 사건은 그 시간의 틈을 유난히 튀어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는 어떤 여자가 옛날에 머물러있는 남자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두 사람의 시간축을 서로 똑같게 맞춘다고 가정해봅시다. 데스데모나가 이아고처럼 고전적 어투로 말한다고 했다면 과연 이 살인은 피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원작속에서 벌어진 일은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입니다. 데스데모나가 아무리 간청했어도 이아고는 살려달라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와 같은 현대식 어투로 대화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일말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이 쪽이다. 오셀로가 현대부부의 남자들처럼 대화했다면 이 부부는 크게 싸웠을지언정 오셀로의 망상이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시간에 머무르는 언어는 그 자체로 소통의 족쇄가 됩니다.

이번 연극의 오셀로는 재해석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일단 글로 읽었을 때 오셀로는 수많은 차별과 음해를 꿋꿋이 견디고 온 단단한 인격자의 인상이 있었습니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오셀로가 무어인(흑인)이라고 당하는 또 다른 부당한 처우였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차별에 진중하게 항의를 하면서도 분노나 억울함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런 모습이 오셀로의 핵심이었습니. 그래야 이 전반부의 굳건한 모습이 질투심으로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관객들은 그 붕괴의 과정을 목격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오셀로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보는 저는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유태웅씨가 연기한 오셀로는 인격자와는 거리가 있어보였습니다. 부당한 공격에 점잖게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공 혹은 다른 자아에 취한 느낌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거들먹거리면서 자신에게 절대 해를 입힐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오만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이 재해석대로 간다면 오셀로의 살인은 이아고의 꾀임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처음부터 자기애에 취해있는 결과일 것입니다. 오셀로는 이아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 스스로 이아고를 조종한 제 1의 가해자입니다. 이번 연극은 오셀로에게 연민의 여지를 최대하 줄이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오셀로는 자신의 아내를 믿지 못했을까요. 많은 이들이 그것은 이아고의 자극에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눌린 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 연극에서의 이아고는 자기중심적이고 남들과 대화를 할 줄 모릅니다. 그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는 것은 그 자신의 약함이 아니라 '어떻게 감히 나를?'이라는 그 자신의 오만에 더 가까워보입니다. 원작에서는 무어인으로서 내재된 열등감과 남성 근본의 소유욕이 불씨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분노에 도취되기를 선택한 듯한 모습이 있습니다. (카시오가 마시지 못한 술을 마시고 부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도 그와 연결된 것은 아닐까요) 이 때 오셀로의 혼자서만 고전적인 톤은 그 자신이 고전의 주인공이듯이 취해있다는 묘사이고 데스데모나의 현대적인 톤은 그 어떤 것도 달리 꾸며낼 필요 없이 일상에 발을 붙인 자의 솔직함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이 이야기속의 주인공인 것처럼 얼마나 많은 합리화의 실수를 저지르며 살고 있는지요.

이러한 불협화음은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이려 할 때 그 절정을 이룹니다. 오셀로의 고전톤의 대사들은 자기 감정에 완전히 빠져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고집불통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원작의 오셀로가 운명에 휘말린 느낌이라면, 이 작품의 오셀로는 선택의 모든 가짓수를 외면하고 맹목적으로 자기감정만 믿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와 다를 게 없는 데스데모나의 애원이 오셀로의 장중한 언어에 가로막힐 때, 오셀로의 그 모든 것은 에고에 심취해있는 괴악한 모습입니다. 왜 저렇게 자기밖에 모를까요. 그래서 에밀리아의 멍청한 인간이라는 그 비난은 훨씬 더 시원하게 다가옵니다. 오셀로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행동한, 명백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무대가 만들어낸 미쟝센 또한 이질적이었습니다. 오셀로를 비롯한 인간들이 얼마나 인간적이고 이 사건이 얼마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원초적으로 차단하는, 무기질적이고 무저갱같은 공간감을 만듭니다. 지하, 혹은 어딘가의 폐쇄된 축축하고 빛도 안드는 곳에서 사람들은 결국 환상에 휘둘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제 기대와는 달랐지만 이렇게 변형되었다 느끼는 부분들을 짚어보니 이런 파생작을 만들어낸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더 진지하게 곱씹게 됩니다.

@ 원작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이아고가 에밀리아와 함께 데스데모나를 만났을 때 바로 옆에서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 계속해서 욕을 늘어놓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 빠지면서 성차별적인 표현이 빠지고 여성관객들을 배려하는 효과도 있었겠지만, 이아고란 인간이 가진 여성혐오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을 빼면서 그가 가진 사악함이 남성을 향한 시기심에 더 집중되는 효과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이아고가 왜 저러는지 더욱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연극은 그를 정말 악마적 존재처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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