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저리와의 카톡

2019.01.0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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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막내동생은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청년이에요. 언젠가 밤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별의 숫자보다 내 취미 쪽이 약간 더 많겠군.'이라고 근자감을 표출했을 정도니까요. 
그 중에서 가장 즐기는 취미는 '누나에게 질문해대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난데없는 질문 퍼붓기.'
어느 현자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평화적으로 승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고 갈파한 바 있는데, 막내는 그 처세술을 완전히 체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휴가 마지막 날, 이 게시판에서 추천받은 모 드라마 보기에 몰두해 있는 참인데, 띠링~ 
머저리> 어, 누나. 짧은 질문! 글은 정직하게 글쓴 사람을 반영한다고 생각해? 
머저리 누나> 글쎄... 비교적 현재의 자신을 정확하게 보여주긴 하지.
머저리 누나> 글은 정직하기 어렵다든가 정직해야 한다는 건 윤리론이고, 모든 글은 이미 정직하다는 건 존재론이랄 수 있겠는데,
난 글의 존재론 쪽 손을 들어주는 입장이야.

머저리> 흠. 존재론 쪽이 더 너그러운 건가?
머저리 누나> 너그럽다기 보다는 더 넓게 생각하는 자의 윤리 아닐까. 아니, 윤리론적 시비의 계곡을 넘어선 뒤의 평원 같은 거랄까.
머저리> 흠.

머저리> 누난 내 글이나 말의 의견 개진 스타일이 불친절하다고 생각해?
머저리 누나> 질문의 요지가 뭐야? 
머저리> 오늘 랩 친구 하나가 그러는거야. 내 설명은 표현의 측면에서 오해의 여지가 많다고.
머저리 누나> ?

머저리> 가령 이런 거야. 작업하던 중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곡을 듣게 되거든?
머저리> 오후 내내 그 선율이 귓가에 맴돌아서 친구에게 그 곡을 들어보라 권하고 이런 말을 붙이지.
머저리> '원래 슈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추운 겨울 거리에서 듣는 슈만의 피아노 선율은 특별하다. 겨울 공기와 슈만은 아주 잘 어울린다.'
머저리 누나> 음.

머저리> 슈만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어느 순간엔 예외로 그의 뛰어난 점이 훅 들어온다는 점을 명백히 해두고 싶어서 그렇게 설명하는 거거든?
머저리> 근데 어떤 애에겐 그게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이나봐. 표현만 있고 설명이 없다며 삐죽대더라고.

머저리 누나> 니가 슈만을 좋아하건 말건 친구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지. 사람들이 정작 관심을 갖는 건, 니가 슈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인 법이거든.
머저리> 그러게 말야.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바보같지 뭐야.

머저리 누나> 설명과 표현은 분명 영역이 달라. 특히 듣고 읽는 사람에겐 그 경계가 꽤 유동적일 수 있을거야.
머저리> 유동적이라?
머저리 누나> 슈만의 음악을 아예 모르는 사람에겐, 슈만도 모르는 판에 겨울 오후의 거리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말은 자신의 무지만 오리무중으로 강화시키는 요령부득의 말로 들릴 수 있겠지?
머저리 누나> 즉 문외한에게 설명이 아닌 표현은 무의미할 수 있음.
머저리> 쫑긋

머저리 누나> 뭐 평소 슈만을 좋아해온 사람이라면 다르게 읽겠지.
머저리 누나> 그런 이는 슈만의 곡이 감정을 순화시키는 우아한 신호들로 충만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따라서 그 리듬과 색채감 풍부한 화성법에 끌린 너의 예외성에 대한 코멘트가 설명 영역의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

머저리> 개인적인 표현이 누구에게나 쓸데없는 건 아닌거네?
머저리누나> 끄덕.
표현에 집착하는 입장도, 또 남의 표현을 과시나 과잉으로 보는 입장도,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함.

머저리>??
머저리 누나>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되는 건, 욕구와 필요 ... 둘 중 하나에 의해서일 텐데
머저리 누나> 음악감상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지만,
어떤 음악을 듣느냐엔 욕구가 개입되는 거고, 다양한 문화의 층위에서 자기정체성-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심리랄까... 그런 자연스런 욕구와 관련 있다고 봐.
그런데 필요(need)의 관점에서는 그런 욕구(desire)가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척'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것 같더라.  

머저리> 흠. 잉여정보가 필요한 상황에서만 표현을 통해 그걸 제시하는 게 똘똘한 교류인 거네... 어렵다.
머저리 누나> 쉽지 않지.
마저리 누나> 그러니까 글을 쓸 때 부각의 대상이 슈만인지, 아니면 슈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 너 자신인지를 먼저 결정한 후에 글이든 말이든 하면 좋을거야.

머저리> 역시 슈만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멋진 문장 몇개가 필요한 거군.
머저리 누나> 듣고 읽는 쪽에선 설명해주는 글이 맥주 첫잔처럼 개운한 거니까.
머저리> 어렵다.

머저리 누나> 근데 열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 좋은 글/말은 아니지 뭐. 누구나 좋아하는 글/말은 유아의 재롱 같은 것 아닐까.
머저리> ㅋㅋ 위로가 되네.
머저리 누나> 복도 많지.

머저리> 그나저나 여행도 안 가고 일주일이나 집에 콕 박혀 뭐한 거야?
머저리 누나> 뭐... (우물쭈물)
머저리> 또 멍~ 병이 도진 건 알겠는데
머저리> 블레이크가 그랬거든? 그의 태도가 그의 운명을 만든다고.
머저리> 누난 그 나쁜 습관부터 고쳐야된다고 봐. 
머저리> 빠빠이~

그가 폰 저너머로 빛처럼 빠르게 사라지자 (같잖아서 원~) 고요하던 가슴 속에 배 한 척이 뜨더군요. 그리움인 듯, 여운인 듯. 
휴가 첫날 본가에 다녀온 후론 내내 폐인 모드로 방콕했던 일주일 저의 휴식 시간이 새삼 감격스러워 이제 축배 한잔 들어야겠습니다. 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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