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소바

2019.06.24 17:23

은밀한 생 조회 수:1717

우리는 냉소바를 먹으러 갔어요.
그 식당은 계산대 뒤로 오픈 키친인 구조예요.
음식이 나오면 직접 가서 받아와야 하죠. 계산대에는 앳된 여자 알바분이 있었고 오픈 키친에서는 사장님 또는 적어도 책임자로 보이는 분이 요리를 하고 있었어요.. 가게가 협소해서 모두가 서로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죠.

냉소바가 나왔습니다.
저의 지인은 냉소바를 가지러 갔지요. 평소 같으면 저도 함께 일어나서 받으러 갔을 텐데, 마침 업무 카톡에 답을 하느라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저의 지인이 자리에 돌아와 조용히 앉더니 “소바를 엎질렀어” 하면서 옷을 닦더라고요. 알바분이 한 손으로 소바가 놓인 쟁반을 내밀었고, 저의 지인이 그걸 두 손으로 받아들기 전에 알바분이 먼저 손을 놔버려서 냉소바가 다 엎어졌답니다. 지인 옷에도 다 튀고요. 그니깐 쟁반을 저쪽에서 주면 이쪽에서 보통 두 손으로 쟁반 양쪽을 잡잖아요. 그 양쪽을 잡으려고 한 순간 손을 너무 일찍 놔버린 거죠.
그 순간 요리하던 남자분이 죄송하다고 얘기를 했고 정작 손을 놔버린 알바분은 멀뚱 보고만 있더래요. (보통 그런 경우에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하든가 옷을 닦을 물티슈를 주지 않나요...) 물론 알바분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쟁반이 순간 무거워서 얼른 놔버린 걸수도 있지요. 제가 당사자였다면 아마 “헉 그렇게 빨리 놓으시면 어떡해요 ;;;”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지인분이 평소에 굉장히 까칠한 타입이에요.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자신의 까칠함과 분노를 억누르려고 노력을 많이 하지요. 화내고 나면 몸이 아파요... 스트레스가 응급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병을 앓고 있기도 하고. 무례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굉장히 욱해서, 그런 것들에 해탈하려고 스스로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고 또 많이 나아지기도 했어요. 여튼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옷을 닦고 숨을 고르던 그 지인이 결국 새로 만든 소바를 직접 들고 온 알바생에게 한마디 했어요. “최소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남자분이 대신 사과해야 돼요?” 이때 요리하던 남자분이 우리 자리로 왔어요. “이 친구가 몰라서 그런 거고요.. 제가 아까 사과를 다 했고요..휴, 뭐 여튼 식사하세요” 그러길래. 아... 이거는 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제가 얘기를 했어요. 쟁반 다 받아들기 전에 손을 놔버려서 음식이 엎질러졌고 옷에 튀었고, 그럼 반사적으로 미안하다는 얘기가 먼저 나오지 않냐고. 어떤 서비스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것은 이해한다고. 근데 길 가다 발을 밟아도 먼저 미안하단 말부터 반사적으로 나오지 않냐고. 그랬더니 알바분은 고개를 끄덕하면서 미안하단 눈빛을 보냈고, 요리하던 남자분은 “그래서 제가 아까 사과드렸고요” 라는 말을 반복.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저의 지인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아무래도 식사를 계속 하면 안될 거 같아서.
주문한 음식에 손도 안 대고 나와버렸어요. 우리는 대략 5분 정도 말없이 걸었고 저의 지인이 “미안해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괜히 한마디 해가지고. 밥도 못 먹었네” 라고 말했지요.

여러분 의견은 어떠신가요.
저의 지인이 정말 그냥 참았어야 했을까요?
그 알바분이 낯을 많이 가려서 또는 손에 힘이 없어서 놓쳤을 거다 이해하면서 옷을 슥슥 닦고 식사를 즐겁게 마쳐야만 했을까요? 저의 지인이 과연 너무 예민하게 군걸까요? 그 식당의 요리사 남자분과 알바분은 아마 저희를 두고 겁나 (뭐 ㅈ나라고 하겠죠) 진상이다 가다가 넘어져라 어쩜 저렇게 이해심이 없냐 할 것도 같아요. 저는 한편으로는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생각도 들고 저의 지인 기분도 이해가 되고 그러긴 하는데. 저라면 과연 어땠을까... 끝까지 미안하단 말을 듣기 위해 따져 물었을까? 그냥 식사를 조용히 마치고 나왔을까? 아님 웃으면서 와 연약한 분이구나 쟁반도 못 들고 놔버리시네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드네요. 저의 지인이 자기 스스로 너무 예민한 게 아닌가 해서 꾹 참아 버릇하는 것도 안쓰럽기도 하고...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얘기할 때 알바분이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하면서 생글거렸는데. 저의 지인은 그 눈빛을 미안한 눈빛이 아니라 비웃는 눈빛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너는 지껄이세요 나는 웃을게요. 그런 거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4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0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04
123413 프레임드 #456 [2] Lunagazer 2023.06.10 85
123412 궁극의 엔터테인먼트 머신 만들기 [6] skelington 2023.06.09 377
123411 산딸기 먹어본 사람 있나요 [8] 가끔영화 2023.06.09 287
123410 프레임드 #455 [6] Lunagazer 2023.06.09 112
123409 한국은 개인주의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4] onymous 2023.06.09 629
123408 졸린 오후 이강인 ㅡ 아틀레티코 정리 기사 [3] daviddain 2023.06.09 185
123407 어쩌다 마주친 그대 차정숙 나쁜엄마 왜냐하면 2023.06.09 276
123406 국가적 자부심이라는 게 무의식적으로 정말 굉장히 센가봐요 [3] Sonny 2023.06.09 433
123405 그럼 다른 얘기를 해보죠. [11] 갓파쿠 2023.06.09 383
123404 한국인들만 있는 커뮤니티에서 한국인들한테 인종차별에 대해 묻기 [13] Sonny 2023.06.09 607
123403 한국은 인종차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심한 나라인가? [25] 갓파쿠 2023.06.09 530
123402 한국이 심한 건 인터넷 워리어 같아요 [9] catgotmy 2023.06.09 334
123401 메시, 마이애미로 간다네요 [4] theforce 2023.06.09 179
123400 국내에서 리사 인기가 4위인게 인종차별? [14] 갓파쿠 2023.06.09 705
123399 [왓챠바낭] 좀 특이한 복수극 영화 두 편, '복수의 밤'과 '늑대들' 잡담 [4] 로이배티 2023.06.09 255
123398 프레임드 #454 [4] Lunagazer 2023.06.08 99
123397 프렌즈 시트콤 시즌1 catgotmy 2023.06.08 221
123396 손오공 탐험기 [1] 돌도끼 2023.06.08 200
123395 헐 케인 레알 이적 임박설 [6] daviddain 2023.06.08 199
123394 한국에서의 인종차별 [42] 잘살아보세~ 2023.06.08 1105
XE Login